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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金台俊, 1905~50) (號)天台山人] ()

(국문학자) 평북 운산에서 태어나 유교적인 집안 분위기 아래서 서당교육을 받았다.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중국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했다. 재학중 경제연구회에 참가하여 사회주의이론을 공부했다. 1930년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를 『동아일보』에 68회에 걸쳐 연재했다. 1931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명륜학원 강사를 지냈다. 그해 국문학 연구자들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고 『조선어문학회 보』와 총서를 간행하는 데 참가했다. 사적 유물론을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 최초로 적용한 저술인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1931), 『조선소설사』(1933)를 발표했다. 그후 고전문학 연구에 전념하여 『증보(增補) 조선소설사』(1939)를 간행했고, 『원본(原本) 춘향전』(1939), 『고려가사(高麗歌詞)』(1939), 『청구영언(靑丘永言)』(1939)을 교열하여 출판했다.
(경성콤그룹 인민전선부 담당자) 1939년 2월 경성제국대학에서 강사로서 조선문학을 강의했고, 재직중 경성콤그룹에 참가하여 인민전선부를 담당했다.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43년경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경성콤그룹 성원들과 소규모 써클활동을 계속했다. 1944년 10월 박진홍(朴鎭洪)과 결혼했다. 11월 국내에서 비밀리에 횡적 연계를 가지며 활동중이던 공산주의자협의회의 군사정책에 따라 재중국 조선인 무장부대와 연계를 맺기 위해 연안(延安)으로 출발했다. 신의주 ․ 안동(安東) ․ 봉천(奉天) ․ 금주(錦州) ․ 산해관(山海關) ․ 천진(天津) ․ 북경(北京)을 거쳐 1945년 4월 연안에 도착했다. 9월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연안을 출발하여 걸어서 11월 하순에 서울에 도착했다.
(조공 ․ 남로당 문화부장) 국내 귀환 전인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 55명의 전국인민위원 명단에 포함되었다. 12월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경성대학에 복직되었다. 이 무렵 교수 ․ 학생 ․ 졸업생 등 60명으로 구성된 전학대의원회에서 세 명의 총장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재건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과 문화부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상임위원 겸 문화부 차장을 역임했다. 그해 ‘국대안 반대사건’으로 400여 명의 다른 교수들과 함께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7월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창간호~제3호)에 「연안행(延安行)」을 연재했다. 그후 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평론부장, 조선 문화단체총연맹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1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7년 ‘8 ․ 15폭동 음모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되었으나 곧 석방된 후 지하로 잠적했다. 이후 남로당 문화부장, 특수정보부장으로서 유격대 지원사업과 기밀탐지사업을 담당했다. 1949년 7월 서울시 경찰국에 검거되어 9월 말 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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