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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항일 학생운동(光州抗日學生運動)] ()

광주학생운동은 한국 학생운동 중의 백미이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학생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인 학생운동으로 전개되어 갔다는 의미에서며, 또한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구호, 즉 〈약소민족해방만세〉, 〈제국주의타도만세〉, 〈피압박민족해방만세〉, 〈무산계급혁명만세〉 등의 구호를 들고 나타났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하면 3 · 1 운동시의 〈조선독립만세〉 대신 〈피압박민족〉 · 〈무산계급〉 · 〈약소민족〉이란 구호가 광주학생운동에 의해 등장한 것이다. 이상의 구호에서 우리는 당시 사회주의사상이 상당히 학생들 사이에 번져 있었던 점을 살필 수 있으며, 나아가서 당시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오늘날과 같은 냉전체제 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종의 항일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1) 전개 : 3 · 1운동 이후 민족독립사상은 각성된 지식인 계충은 물론 농민 · 노동자 · 학생계층에 광범하게 확산되어 갔다. 그것이 1928〜9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소작쟁의 운동과 원산총파업, 평양고무공장 파업이며, 학생운동의 형태로서 나타난 것이 광주 항일학생운동이다. 광주학생운동의 단초는 1925년 11월 광주고보(光州高普)와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 학생 10여 명이 모여 노예교육을 자각하고 민족문화를 연구하려는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고(張載性 · 王在一 등이 주동), 이것이 다시 1926년 민족문화와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독서회〉(讀書會)로 발전, 광주학생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회합에는 광주에 있던 중등학교로부터 많은 학생이 가입되어 왔다. 조선해방과 노예교육 절대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건 이 그룹에서 배양된 민족정신과 배일사상은 1928년 6월 이른바 〈이경채(李景采)사건〉으로 폭발하였다. 즉 광주고보의 이경채라는 학생이 〈조선독립선전문〉으로 해석되는 불온문서를 만들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학교에서는 이경채의 학부형올 불러 권고퇴학을 명했다. 이에 5학년 학생들은 권고퇴학의 이유를 학교에 물었고, 학교는 학부형회의를 열어 학생들의 사상선도를 요청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학부형회와 학교에 몇 가지 조목의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업을 시작했다.
① 교우회(校友會) 내용을 확충하는 동시에 선생을 감독으로 하고 일체의 처리를 학생측에 일임할 것. ② 시라이(白井) 교장은 기만적 행동을 반성할 것(이것은 前年에 약속한 실험시설을 확충치 않았다는 것) ③ 무자격선생 長谷川 · 李大森 · 姬野 등의 사직을 촉구함. ④ 池田 · 渡邊 · 福重 등 세 선생은 교육자적 양심을 반성할 것. ⑤ 학생에게 고압적 수단을 보인다든가 퇴학 · 정학 · 근신 등을 불충분한 이유로 감행치 말며 이경채 군이 석방되면 복교시킬 것. ⑥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실현키 위하여 조선인 교원을 다수 채용하는 동시에 조선역사와 조선어 문법을 교수(教授)할 것. ⑦ 4,5학년 급장 11명에게 명령한 근신을 취소할 것.
이상의 여러 조건 중에 핵심적인 사항은 ④와 ⑥에 있다고 하겠다. 그만큼 학생들은 조선을 알고 싶어했고 그만큼 일본인 교사를 미워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주동적 활동을 한 27명에게 출학(黜學)처분을 하고 300여 명에게 무기정학을 명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어 가자 사태수습차 광주고보 졸업생들이 앞에 나섰다. 그러나 경찰은 졸업생 중 동경유학생인 최동문의 가택을 수색하는 한편 그를 구속까지 하였다. 이제 학교측과 경찰, 그리고 학생들과 졸업생, 학부모 간의 싸움으로 사건은 확대되어 갔다. 동맹휴업 학생들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모금을 하고,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학부형들에게 일본인 교육의 〈노예적이고 식민적 · 기만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식민지교육〉, 〈노예교육〉이란 말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당시 학생들간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어 있었고, 또 끝까지 싸워 나가겠다는 수법도 이데올로기적인 색채가 농후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목적은 조선민족의 해방에 있었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해결되지 못하니까 간접적으로 학교당국을 괴롭히고 일본인 교사 배척, 교육내용의 조선인 위주화를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학생과 학교간의 싸움이 가열해져가고 있는 가운데서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경 광주에서 통학생을 실은 기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생 4학년 福田修三과 末吉克己 등 수 명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년 朴己玉 · 李光春 등을 희롱하면서 여학생의 댕기를 잡아당긴 것이었다. 이에 조선인 남학생 30여 명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역전 뒤로 가서 일본인 남학생 100여 명과 집단 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은 다음날에도 멈추지 않고 상학 및 하학 열차간에서 계속되었고, 11월 1일에는 단도까지 뽑아드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연출하였다. 드디어 11월 3일(이 날은 마침 明治節이자 음력으로 開天節이었다) 인파가 많은 금남로와 역전 네거리에 모여 있던 광주고보 학생들이 자난달 31일의 고보학생과 중학생의 충돌에 대해 일방적으로 고보생을 나무라는 기사를 실은 광주일보사를 습격,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으며, 시내 여기저기에서는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일본인 중학생은 수백명이 작당하여 유도선생을 앞장 세우고 야구 배트를 들고 〈광주고보학생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역전으로 몰려들었다. 이 급보에 접한 광주고보 기숙사 학생들도 축구화를 신고 배트와 몽둥이를 들고 역전으로 모였고, 또 농업학교의 조선인 학생들도 수백 명 역전으로 쇄도하여 양편은 일대 난투극을 벌였다. 수가 많은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인 중학생들은 점점 밀려 성저리(城底里)에 이르러서는 퇴로까지가 막혀버렸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리었으나 경찰과 소방대 및 양교의 교직원의 필사적 노력으로 고보생들은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학교로 돌아가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부상당한 학생(鄭相烈 · 吳甲錫 · 崔雙鉉)들의 보고를 듣고 격분해서 다시 광주중학을 습격하려고 몽둥이와 검도구 및 대칼(竹刀)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때에 농업학교와 사범학교의 조선인 학생들도 합세하였고, 여자고보학생들까지 가담해서 치마에 돌맹이를 날라다 주는 등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500여 명이 만세와 운동가를 부르면서 행진했다. 그러나 도 당국은 경찰, 소방대 및 재향군인까지 동원해서 막았기 때문에 시위행렬은 다시 고보 쪽으로 향해서 학교로 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날의 사건으로 경찰은 치안유지라는 구실 아래 고보생 59명과 농교생 11명, 사범학교생 5명, 도합 75명을 검거했으며, 일본인 학생 10명도 검거했다.
많은 학생들이 검속됨에 따라 고보생들은, 이것은 민족적 편견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개한 나머지 제2차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고보학생(吳快一, 李翎範 · 金鴻南)과 농고생(金南哲 · 鄭昱 · 曹吉龍) 및 사범학교생(李信珩 · 黄相南) 등이 11월 10일 朴錫紀 집에서 모의하고 12일 장날을 기해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학생과 일반 민중에게 보내는 선언문도 작성하였다. 학생들에게 보내는 선언문은 〈학생대중아, 궐기하자〉라는 표제하에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① 검거자를 즉시 우리들이 탈환하자. ② 검거자를 즉시 석방하라. ③ 교내의 경찰권 침입을 절대 반대하자. ④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⑤ 직원회에 생도대표자를 참석시키라. 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시키라. ⑦ 민족문화와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⑧ 전국학생 대표회의를 개최하라.
이상과 같은 격(檄)을 날려 학생들의 총궐기와 투쟁을 호소하는 동시에 또한 일반 민중의 지지도 얻으려고 하였다. 이 원고는 오쾌일에 의해서 등사되었고, 고보의 金安鎭 · 姜旻變 · 농교의 조길용에 의해서 다시 다른 학생들에게 분배되었다.
12일이 되자 첫 시간에 金向南이 고보 교실에서 “교우들이 검속되어 철창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만이 그대로 있을 수가 있느냐? 모두 시위에 나서자”고 열렬히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교실로부터 뛰어나와 교문을 나섰다. 김홍남 · 崔相乙 · 김안진 등이 선두에 서서 행진하였다. 도중 여고보와 사범학교로 향해서 시위에 합세할 것을 호소했으나 고보로부터 미리 전화 연락을 받은 학교당국은 교문을 굳게 닫고 학생들의 외출을 막았다. 농교에서는 조길용이 역시 고보생과 같은 말로 학생들에 “교우가 석방되기까지 휴업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런 시위대 행렬은 광주형무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제1차 시위 때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 날의 시위로 고보생 300명과 농교생 100명이 경찰에 체포되고, 그들 중, 치안유지법, 보안법(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한 것) 및 출판법(불법선전문 작성)위반이라는 형명(刑名)으로 70명이 광주지방법원에서 형을 받았다. 4년형이 3명, 3년 반이 13명, 3년이 11명, 2년 반이 26명, 1년 반이 1명, 6개월이 3명, 4개월이 13명이었다.
이상과 같이 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서 전남청년연맹위원 장석천이 서울에 올라가 광주의 사태를 보고하였고, 서울에서도 중앙청년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광주로 조사단을 보내는가 하면, 신간회에서도 간부회의를 긴급히 열고 위원장 허헌과 김병로를 광주로 파견하였다. 또 총독부 경무국에서도 조사원을 보냈다. 한편 광주학생운동의 불길은 광주인근 지역으로 곧장 옮겨갔다. 목포상업학교의 조선인 학생 100여 명이 시위를 하면서 삐라를 뿌리고 애국가를 불렀다. 특히 주의할 것은 이때 학생들이 적기를 들고 시위했다는 사실인데, 반제국주의 · 사회주의사상이 중학생들에게 침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목포정명여학교도 시위하였다. 학생들은 검거되고 검거되면 그것을 이유로 해서 다시 시위가 행해졌다. 나주 · 송탄리 · 영산포 · 함평 등지에서도 학생들의 동정맹휴 및 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겨울방학을 목전에 두고 있는 12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만세시위운동은 계속 번져 서울 · 인천 · 개성 · 공주 · 청주 ·평양 각지의 남녀중학교 · 전문학교 · 대학교 학생들이 맹휴와 시위에 들어갔다. 1월에 들어서면서는 함흥 · 원산 · 오산 · 대구 등지에서 학생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1월 3일에 비롯된 광주학생운동은 이듬해(1930) 3월까지 만(滿) 5개월 동안 전국적인 규모로 맹휴와 시위가 계속되었는데, 참가한 학교는 149교, 참여학생 수는 연 54,000여 명, 이로 인해서 퇴학 맞은 학생은 582명, 무기정학이 2,330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검거된 학생이 1,642명, 그 중에는 최고 4년의 체형(體刑:징역형)을 받은 학생도 있었다. 검거된 광주고보생 중 형을 받은 자는 49명이나 되었다.
(2) 1931년 5월 현재 조선인 전국학생수(小 · 中 · 專)는 587,951명, 그 중에서 소학교 학생수인 499,160명을 제하면 88,851명, 맹휴 및 시위참여 학생수인 54,000여 명은 그 3분의 2에 가까운 셈이다. 광주학생운동이 한국학생운동사 상에서 일제시대는 물론이요 오늘날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것이 이처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5개월 동안이나 계속된 항일민족운동이었고, 그 운동지표가 3 · 1운동이나 6 · 10만세운동보다도 훨씬 분명했다는 데에 있다. 되풀이하자면 광주학생운동은, ① 3 · 1운동이나 6 · 10만세운동과 같은 비폭력노선을 배격하고 폭력노선을 선택하고 있었으며 ② 3 · 1운동 때의 〈조선독립〉이 반일 · 반제국주의 · 무산계급 해방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③ 운동의 주역들이 일제 암흑기에서도 줄기차게 항일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그 주역들이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이나 각종 애국단체에서 활약한 행적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인접어

경향신문 폐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공출(供出)
관동군(關東軍)
광복군(光復軍)
광주 항일 학생운동(光州抗日學生運動)
광주 항일 학생운동(光州抗日學生運動)
광주단지(廣州團地) 사건
교원노조 운동
국가
국대안(國大案)반대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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