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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민중항쟁 ] ()

Ⅰ.배경. 4.3항쟁은 1948년 4월 3일 한반도의 최남단 제주도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폭압과 조국분단에 맞서 모든 제주도 민중들이 봉기하여 일으킨, 미군점령기의 가장 거대한 민중항쟁 중의 하나이다. 이미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장구하고도 강력한 반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온 제주도 민중들은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처단과 토지개혁 등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의 완수라는 당시의 민족적, 민중적 합의에 기초하여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도 강력하게 자주적 인민정권 수립을 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국적 수준은 물론 자주적 인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지방수준의 모든 노력들까지도 폭력적으로 억압, 고사시켰고 나아가 분단정책을 노골화한 이후에는 각종 물리력과 테러단체를 동원하여 독립과 통일을 향한 남한 민중들의 투쟁을 더욱 직접적이고도 무차별적으로 탄압했다. 이와 같은 전국적, 보편적 모순구조와 정세가 제주도의 제반 특수성(전통적인 독립주의 성향, 사회경제적 열악성, 문화적 일체감과 혈연적•언어적 연대, 지리적 고립, 그리고 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세력과 통일운동세력의 주도권 장악 및 이들에 대한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과 중첩되면서 폭발한 것이 4•3민중항쟁이었던 것이다

Ⅱ.경과. 이미 해방직후부터 자주적 인민정권을 수립하려 노력하는 제주도 민중들을 억압하기 위해 본토로부터 각종 물리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탄압하던 미군정은 1947년 3월 1일 3•1운동 28주년을 기념하여 시위를 하던 도민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여섯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 도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군정의 이와 같은 학살에 맞서 제주도 민중들은 파업, 성명, 항의를 통해 미군정의 사과와 책임, 학살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도민들의 이러한 최소한의 요구에 대해서조차도 미군정은 경찰 등 물리력의 증파와 서북청년단(서청) 등 각종 테러단체의 투입이라는 탄압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후 미군정, 경찰, 서청 등은 제주도 민중들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체포, 검거, 공갈, 협박, 테러, 갈취를 자행하여 끝내 일부 제주도 민중은 이들을 피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폭압과 임박한 조국분단에 맞서 제주도 민중들은 마침내 1948년 4월 3일 단선단정반대 조국통일, 반미 민족해방, 反경찰•反서청 민중해방을 기치로 봉기를 결행, 거대한 항쟁의 불꽃을 지폈던 것이다. 봉기 결행 이후 제주도 민중들은 극히 악질적인 경찰과 서청단원 등에게만 제한적이고 선별적인 보복을 감행, 봉기의 기본적인 목표와 성격이 자위적인 방어적 공격이었음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은 대규모 군•경찰•서청의 직접적이고도 전면적인 투입으로 나타났다. 미군정의 이와 같은 전면적 대응에 맞서 제주도 민중들은 일규적(一揆的) 봉기로 결행한 항쟁을 장기적인 유격전으로 전환, 장기항쟁에 돌입했다(4월 15일). 유격전으로 전술적 전환을 감행한 후에도 봉기지도부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시도, 군과의 평화회담을 수락, 군과의 사이에 평화적 수습에 합의했으나(4월 28일) 이는 미군정•경찰•청년단의 협정 위반으로 결렬되고 말았다(5월 1일). 결국 제주도 민중들은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여 총 3개 선거구중  두개 선거구에서 단선을 파탄시킴으로써(5월 10일) 미국의 분단책략의 완벽한 관철을 저지시킨 유일한 지역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제주도 민중들의 승리는 일시적이었다. 자신들의 단선정책을 유일하게 저지시킨 제주도 민중들에 대해 미군정은 엄청나게 강화된 물리력을 투입, 거의 모든 제주도민을 폭도•빨갱이로 조작하여 탄압했다. 이를 피해 많은 도민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자연스레 유격대로 합류했다. 여름의 장마철과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일시 소강상태에 빠진 양쪽의 교전은 정부수립 직후 자신들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공세로 재개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도민들의 통행을 제한시키고 소개령을 내려 그들의 삶의 근거지를 박탈한 후 제주도를 완전히 봉쇄, 도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특히 여수의 14연대 병사들이 동족학살 거부, 조국통일을 명분으로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하여 봉기를 일으키자(10월 19일) 이승만 정권은 이후 약 6개월에 걸쳐 전제주도를 초토화시켰는데, 하루 평균 약 백여 명을 참살했다.

Ⅲ.평가. 4.3항쟁은 한국전쟁을 제외해놓고는 한국 근현대 사상 가장 대규모이면서도 가장 참혹하고도 전율할 학살극이었다. 이 때의 대학살극으로 전제주도민의 약 10%인 최소한 3〜4만 명의 도민이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초토화 대랑 살상정책으로 대규모의 항쟁과 살육은 단선 약 1년 후인 1949년 5월 일단락되었으나 봉기의 완전 진압은 한국전쟁을 관통하여 1954년에 가서야 가능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제주도 민중들은 체포자 처형, 보도연맹 가입자 학살, 예방구금 등으로 다시 한 번 적나라한 폭력을 감수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제주도는 한국 근현대사의 민족적, 계급적 모순이 집중적으로 응축된 한 전형으로서 드러나지만 4•3항쟁을 통하여 제주도 민중들은 이러한 민족적, 계급적 모순과 조국분단에 맞서 가장 거대한 민족해방, 조국통일투쟁을 감행한 주체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 ᅳ여순무장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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