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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金日成, 1912~94) (本)金成柱] ()

(汪淸유격대대 정치위원)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재 만경대)에서 민족주의자 김형직(金亨稷)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으나 1923~25년 약 2년간 부모의 뜻에 따라 혼자 평양에 돌아와 외가가 있던 칠골의 창덕학교(彰德學校)에 다녔다. 길림성(吉林省) 무송현(撫松縣)의 무송제1소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6월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에 있던 정의부 소속의 화성의숙(華成義塾)에 입학했다. 그해 가을 화성의숙에서 퇴학하고 1927년 길림 육문중학(毓文中學)에 입학하여 재학중 조선소년회, 유길학우회(留吉學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그해 가을 반일 활동 혐의로 중국 군벌당국에 체포되어 몇달 간 투옥되었다가 1930년 5월 출옥했다. 이 때문에 육문중학에서 퇴학당했다. 그후 길림성 카륜(卡倫) ․ 고유수(孤楡樹) 지방에서 이종락(李鍾洛)이 지도하는 조선혁명군 길강성(吉江省)지휘부 대원이 되었다. 1931년 초 동만(東滿)으로 이동하여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2월 연길현(延吉縣) 옹성랍자(甕聲磖子)에서 열린 ‘동만 각 현 공산당 ․ 공청 열성자회의’에 참석했다. 1932년 4월 길림성 안도현(安圖縣)에서 반일유격대 결성에 참여했다. 1933년 왕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
(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시장) 1934년 3월에 건립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獨立師)에 가을경 참여하여 제3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10월부터 1935년 1월까지 휘하부대와 함께 영안현(寧安縣)으로 진출하여 수녕반일동맹군(綏寧反日同盟軍)과 공동작전을 전개했다. 한때 민생단원으로 몰렸다. 3월 요영구(腰營溝)에서 열린 제2군 정치위원 연석회의에 출석하고, 7월 동북항일연군 제2군과 제5군의 연합작전에 참가하여 북만(北滿) 일대에서 전 투했다. 1936년 3월 안도현 미혼진(迷魂陣)에서 열린 제2군 영도간부회의에 출석했으며, 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3사장이 되었다. 5월 무송현 동강(東崗)에서 열린 제2군 고급간부회의에 출석했다. 7월 항일연군 조직개편에 따라 제1로군 제2군 제6사장이 되었다. 이 무렵 길림성 장백현(長白縣)과 조선 함남 일대에서 전개된 반일통일전선단체 재만한인조국광복회 조직사업을 주도했다. 1937년 6월 항일연군 ‘북조선파견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에 나 서, 보천보(普天堡)전투를 지휘했다. 1938년 11월 유격대 편제가 개편됨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이 되었다. 그해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일본군의 제3차 대토벌에 맞서 100여 일에 걸친 겨울철 눈속 행군(고난의 행군)을 지휘했다. 1939년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대토벌작전으로 타격을 받던 중, 1940년 3월 안도현 대마록구(大馬鹿溝)에서 토벌대 마에다(前田)중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8월 돈화현(敦化縣) 소합니파령(小哈爾 巴嶺)에서 열린 제2방면군 간부회의에 참석했고, 10월 부대를 이끌고 소련 영내로 퇴각했다. 1942년 8월 소련에서 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 소련극동방면군 제88보병여단) 결성에 참여하고 제1교도영 영장(營長)이 되었고, 9월 항일연군 교도려 내에 설립된 중공 동북당 특별지부국 집행위원이 되었다. 1945년 7월 중공 동북위 내에 설치된 조선공작단위원회에서 정치군사 담당 책임자가 되었다.
(노동당 중앙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1945년 9월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귀국했다.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결성을 주도하여 12월 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8월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하고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내각 수상이 되었다. 1949년 6월 남북 노동당을 통합하여 단일한 조선노동당으로 일원화하고 당 중앙위원장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내각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군사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했다. 1953년 초 박헌영(朴憲永), 이승엽(李承捧) 등의 당내 반대파를 숙청했다.
(노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한국전쟁 후 복구건설노선으로 ‘중공업 우선, 경공업 ․ 농업의 동시 발전’이라고 일컫는 사실상의 중공업 우선정책을 제시했고, 농업협동화를 비롯한 사회주의적 개조를 추진했다. 1956년 8월 연안파와 소련파로 구성된 당내 반대파를 숙청했다. 그후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로 대표되는 주체사상을 제창하고,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자주’와 ‘자력갱생’의 노선을 추구했다. 1966년 10월 노동당 중앙조직을 재편하고 당 총비서가 되었다. 1967년 박금철(朴金喆), 이효순(李孝淳) 등의 당내 반대파를 숙청하고 유일지도체계를 구축했다. 1972년 국가 주석의 절대권력을 보장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국가 주석이 되었다. 1974년 2월 아들 김정일(金正日)을 당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1980년 이후 점차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1994년 7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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