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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적 사회주의] (utopian socialism)

사회주의 역사의 최초의 단계인 나폴레옹 전쟁부터 1848년 혁명까지의 시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사상의 주요 흐름들을 이끌어 온 것으로 간주되는 세 명의 사상가와 특히 관련이 있다. 즉 생시몽(1760-1825), 푸리에(1772-1837)와 오웬(1771-1858) 등을 말한다.
‘사회주의자’란 말 그 자체와 같이 ‘공상가’(utopians)로서 이들을 함께 지칭하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1830년대 후반에 처음으로 일반화 되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회주의’의 미래의 모습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용어 사용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과 시민계급과의 투쟁이…일찍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와 관련된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적 사회주의비판’이라는 비평에서 윤곽이 잡혀졌고, 엥겔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가 발표된 뒤 사회주의적 역사편찬 과정에서 확립되었다. 이러한 접근방법에 따르면 ‘공상적’이라고 지칭된 이유는, 변화를 가져오는 데 계급투쟁의 필요성과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역할에 대한 인식도 없이, 개인주의와 경쟁 그리고 사유재산권의 제거를 내포한 총체적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1848년 이전 사회주의를 아직 완성되지 못한 어떤 마르크스주의로 취급한다면 이것은 약간의 기본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노동자계급의 특수한 이익을 ‘사회주의’에 얽어 놓았던 것은 1830년대 영국과 프랑스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오웬주의, 생시몽 주의, 그리고 푸리에주의의 특징적 모습은 이 결합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적 입장과 동일시되었던 몇몇의 증거는 이 세명의 사상가들의 최초의 체계적 저서-생시몽의 《제네바 주민들의 편지》(1802), 푸리에의 《4개의 운동 이론》(1808), 오웬의 《사회의 새로운 전망》-를 비교함으로써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출발점의 차이이다. 생시몽과 푸리에의 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과정에 대한 책임을 인간 본성에서 찾고자 한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웬의 이론은 계몽주의적 주체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특히, 푸리에와 생시몽은 본유적(本有的)-심리학적 유형들의 (매우 특이한) 이론에서 출발했고, 개혁을 이 유형들의 조화스런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합의의 달성으로 인식했다. 다른 한편으로, 오웬은 인간의 성격은 외적 상황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회의 개혁은 경쟁과 갈등 대신 조화와 협동을 행복의 추구와 결합시키는 환경의 창출을 포함하고 있었다. 성격과 환경의 접근 방법에 대한 이런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전통의 추종자들이 1820년대 후반부터 서로 경쟁하기 시작하면서 그들 사이의 불일치의 핵심적 요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사상에 약간의 특징적 공통의 전체조건이 있었다. 첫째, 세가지 이론 모두가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과학을 확립하려는 열망에서 출발한다. 둘째, 이들은 인간 행태의 모든 측면을 결정짓는 기초로 도덕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분야에 초점을 두고 있다. 셋째, 이 분야를 사회적 조화의 문제를 해결할 정확한 과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열망이다. 넷째, 기존의 도덕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이론(계급이나 국가적 실천이 아니라)을 새롭게 발견된 조화의 법칙을 실현하는 데 근본적으로 방해가 된다고 인정한 점이다. 다섯째,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도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인간 또는 사회분야에서 뉴튼과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였다. 이러한 유사성으로부터 1820년대와 1840년대 사이에 생겨난 ‘사회주의’의 수많은 변형과 혼합물 속에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 오웬[Owen]은 뉴 레나크 직물공장-오웬은 이 공장이 자신의 이론을 실천적으로 입증한 실례라고 주장한다-을 경영하고, 자신의 원칙에 입각한 공동체의 건설을 통해서 전후 실업을 구제하려는 계획을 제안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자신의 계획이 지닌 가치를 지배하는 정치체제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는 오웬의 노력은 실패하였는 데, 그것은 국교인 기독교가 설정한 가설과 명백하게 상충되기 때문이었다. 그 뒤 오웬은 뉴하모니 공동체의 건설을 통해서 자신이 제창한 원리의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없는 사이에 그의 사상은, 공동체보다는 오히려 경쟁에 대한 대안으로서 협동생산과 교환에 관심이 깊었던 급진적 노동자계급에 의해서 채택되었다(→협동조합). 1830년대 초기 수백 개의 협동조합이 설립되었고, 노동교환과 생산자 총연합을 실현하려는 유사한 시도가 여러 번 행해졌다. 이러한 시도들은 1834년의 결국은 실패한 전국 노동조합 총연맹(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 Union)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계획이 실패한 뒤 오웬주의자들은 공동체의 시도(퀸즈우드에서)와 정통 기독교에 대항하는 자신들의 ‘합리적 종교’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프랑스에서는 생시몽의 사상, 특히 그의 마지막 저서《새로운 기독교》(1825)에 담긴 사상이 파리 이공과대학의 과학도와 공학도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생 아망 바자르(1791-1832)와 프로스페 앙팡댕(1796-1864)에 의해서 지도되었던 이 그룹은 1829년에 유럽의 지식인 사이에 생시몽의 사상을 유포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저서인 《생시몽주의》를 출판하였다. 1829년 뒤 이 그룹은 해체되었다. 푸리에주의의 영향은 생시몽 학파의 해체 뒤 곧바로 나타났지만, 생시몽 학파의 많은 사상, 특히 성(性)에 대한 것은 이미 푸리에주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흡수되었다. 앙팡댕의 지도 아래 있었던 생시몽주의자들 가운데 그 주요 인사들은 1832년 메닐몽탕에서 불행하게도 단명으로 끝난 생시몽주의 교회와 공동체를 창립하였다. 6월 혁명 뒤 뿔뿔이 흩어진 그들 가운데 몇 명은, 그 가운데 특히 필립프 부셰(1796-1865)와 피에르 르루(1791-1871)는 수정된 형태의 생시몽주의를 노동자 서클에 이입-즉 이제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교의를 노동자계급의 특수한 열망에 연결하려 했던 최초의 명백한 시도-하였다.

[관련자료]
Beecher, J. and Bienvenu, R. eds. 1972: The Utopian Vision of Charles Fourier.
Droz, J. ed. 1972: Histoire générale du socialisme.
Duveau, Georges 1961: 'Sociologie de l'Utopie' et autres essais.
Fourier, Charles 1808(1968): La théorie des quatres mouvements.
Harrison, J. F. C. 1969: Robert Owen and the Owenites in Britain and America.
Iggers, G. C. ed. 1829(1958): Doctrine of Saint-Simon, An Exposition, First Year.
Johnson, C. 1974: Icarian Communism in France: Cabet and the Icarians, 1839-1851.
Lichtheim, George 1969: The Origins of Socialism.
Owen, Robert 1812-16 (1969): Report to the County of Lama가: A New View of Society.

마르크스 : 이 유토피아, 공론적 사회주의는 전체운동을 대부분의 동인(勤因)중 하나에 종속시키고, 공동적ㆍ사회적 생산 대신에 개별적인 ‘변명가’의 두뇌활동에 두며, 특히 필연성가진 혁명적 계급투쟁을 잊어버리고 잔손재주나 감상적인 공상에 열중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요컨대 현 사회제도를 이상화하고, 이 사회의 암영(暗影)을 제거한 상(像)을 묘사하여 이 사회의 현실에 저항함으로써 자기의 이상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다.一 이 독단론적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로 부터 버림받은 소시민층의 것으로만 되었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1850, MㆍE선집 제5권, P. 116).

마르크스・엥겔스 : 이〔소부르주아〕 사회주의는 현대 생산관계의 모순을 훌륭하게 볼 줄 알았다. 이 사회주의는 경제학자들의 위선적 변호를 폭로하였다. 이 사회주의는 기계에 의한 생산과 분업이 미치는 파괴적 작용, 자본과 토지소유의 집중, 과잉생산, 공황, 소부르주아 및 소농의 필연적 몰락, 프롤레타리아트의 빈궁, 생산의 무정부성, 부의 분배에서의 엄청난 불평등, 민족 상호간의 공업상의 섬멸전, 낡은 가족관계 및 낡은 민족성의 와해를 반박 할 여지없이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는 그 적극적 내용에 있어서의 생산 및 교환의 낡은 수단들, 그리고 그와 함께 낡은 소유관계와 낡은 사회를 부흥시키려고 하거나, 또는 현대의 생산수단 및 교환수단들을 낡은 소유관계의 틀 속에, 즉 현대의 생산수단 및 교환수단에 의하여 이미 폭파되었으며, 또 폭파되어야 하였던 그러한 낡은 소유 관계의 틀 속에 또다시 억지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 이 사회주의는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다 같이 반동적이기도 하며 공상적이기도 하다. (공산당 선언, 1848, 혁명에 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및 전술에 대하여 제1권, 학우서방, 동경, 1966, p.37).
원래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체계 즉, 생시몽(Claude Henri de Rouvroy, Conte de Saint-Simon, 1760〜1825), 푸리에(FranQoi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 오웬(Robert Owen, 1771〜1858) 등의 체계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의 투쟁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초기에 생겨났다(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보라). 하긴 이러한 체계의 발명자들도 계급들의 대립과 지배적 사회 자체내부에 있는 파괴적 요소의 작용을 보고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는 아무런 역사적 독자성도 그에 고유한 정치 운동도 보지 못한다. …… 사회적 활동의 자리를 그들의 개인적인 발명활동이, 해방의 역사적 제 조건의 자리를 환상적 제 조건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에로 점차 조직 되어가는 과정의 자리를 이 발명가들이 고안해낸 처방에 의한 사회조직이 차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 세계의 장래 역사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사회적 계획의 선전과 실천에 귀착된다. 하긴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에서, 주로 가장 고난을 당하고 있는 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다만 이와 같이 가장 고난을 당하고 있는 계급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미숙한 형태와 그들 자신의 생활상 처지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이 계급적 적대를 높이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사회의 전체성원의 처지를 심지어는 가장좋은 조건에 처해있는 성원들의 처지까지도 개선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상 아무 구별도 없이 사회전체에 아니 주로 지배계급에게 호소한다. 그들의 의견에 의하면 자기들의 체계를 이해하기만하면 그것은 건설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사회의 가장 훌륭한 계획으로 인정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정치적 활동, 특히 모든 혁명적 활동을 배격하며 평화적 방법에 의하여 자기목적을 달성하려고하며 작은—— 물론 실패로 돌아가곤 하는—— 실험에 의하여 실례의 힘으로써 새로운 사회적 복음에로의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한다. 미래사회에 대한 이러한 환상적인 묘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매우 미숙한 상태에 있어서 자체의 처지를 아직 환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대에 발생하였으며 사회의 전반적 변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예감으로 가득찬 최초의 충동에서 발생하였다. … … 미래사회에 관한 그들의 적극적인 결론들 예컨대 도시와 농촌간의 대립의 폐절 가족ㆍ사적 축재 및 임금노동의 폐절 사회적 조화의 선포 국가의 단순한 생산관리 기관에로의 전화—— 이러한 모든 명제들은 이제 방금 발전하기 시작하여 시초적 형태로 막연하고 불명료하게 밖에는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않은 계급적 대립을 제거할 필요성을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들도 아직 완전히 공상적인 성격을 띤다. (동상 pp.43〜45).

엥겔스 : 생시몽파 교의의 일반적인 정신이 영국의 햄 코몬 소시얼리스트 (영국 사회주의자의 한 무리를 지칭 : 역주)의 그것과 설령 그의 구조와 사상의 세부사항이 크게 차이진다 해도, 매우 유사한 것이다. 생시몽주의자의 괴벽스럽고 유별난 성질 은 곧 프랑스인의 기지와 냉소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더우기 프랑스에서 일단 웃음거리로 된 것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그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생시몽주의자의 여러 시설에서의 실패는 이외에도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이 학파의 교의는 모두가 알기 어려운 신비주의의 구름으로 둘러싸였는데, 그것이 모름지기 처음에는 아마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지만, 나중에는 그들의 기대를 배반해 버렸다. 그들의 경제상의 제원칙 역시 이의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공동체 성원에게 돌아가는 몫은 생산물 분배에서 첫째로, 그 사람이 수행한 작업량에 의하여, 둘째는 그가 발휘한 재능의 양에 의하여 규제하기로 되어 있었다. 독일의 공화주의자 뵈르네(Ludwig Borne, 본명은 Lob Baruch, 1786〜1838)는 이 원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즉, 재능은 보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특혜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평등을 회복하려면 천부의 재능에서 오는 분배 몫에서 어느 정도의 공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생시몽주의는 마치 반짝이는 유성처럼 사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의를 끈 다음, 사회의 지평선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지금은 이에 대하여 그 누구도 생각하거나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생시몽과 거의 같은 시기에 또 하나의 인물이 인류의 사회상태에 대하여 그의 재능을 힘 있게 활동시켰다. —— 그 사람은 푸리에이다. …… 사회 철학의 위대한 공리를 최초로 체계화한 것도 푸리에이다. 개개인은 어떤 특정작업에 대해 제각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모든 개인의 이 모든 선호의 총계는, 전체로서는 만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과부족 없는 힘이 된다는 공리가 즉 그것이다. 이 원리로부터 다음의 결론이 나온다. 즉, 개개인 각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일하거나 또는 그만두는 것처럼, 그들 자신의 취미ㆍ기호에만 맡겨두면, 오늘날의 사회제도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강제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더라도 만인의 요구가 충족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얼핏 보기에 무모한 것처럼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푸리에의 논법에 의하면 전혀 비난의 여지없는, 거의 자명한 일——즉, 콜럼부스의 달걀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 : 역주)과 같다는 것이다. 푸리에가 증명하는 바에 의 하면 각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무엇인가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을 가지는데, 절대적인 나태란 무의미하며, 따라서 결코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또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정신의 본질은 그 자체가 활동적인 것이므로 육체를 활동에로 이끌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상태처럼 강제적으로 사람들을 작업시킬 필요는 없고, 다만 자연적인 활동성에 방향을 돌리도록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노동과 향락의 합일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리하여 노동을 고역으로, 향락을 노동자 대부분이 원하는 높은 산마루 위의 꽃으로 비유하는 현 사회제도의 불합리성을 밝히고 있다. 그는 더 설파하기를, 합리적인 편제 하에서 노동이 여하히 향락으로 전화될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즉, 각자가 자기의 취미ㆍ기호에 따라 일하도록 맡겨두면, 노동은 그런 것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물론 그의 자유노동 설에 긴 해설을 하고만 있을 수 없어 이것으로 그치지만, 이상의 소개만으로도 푸리에 주의가 영국 사회주의자 제군(諸君)에게는 확실히 주의를 돌릴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데 충분 하다고 생각된다. …… 그러나 푸리에주의에도 하나의 자가당착이 있다. 이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사유재산 불폐지설이다. 그는 팔랑스테르(phalanstSre), 즉 공동체조직 내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고 자본가와 노동자가 있다. 모든 성원의 재산은 공동자본으로 되고, 그의 조직이 상업ㆍ농업ㆍ제조공업을 경영하며, 그리고 이익은 그 성원 간에서 분배된다. 일부는 노임으로서, 또 일부는 숙련과 재능에 대한 보수로서, 세 번째는 자본의 이윤으로서 지출된다. 이렇게 해서 단결과 자유노동에 관한 아름다운 이론의 끝머리에 또다시 상업 이기심ㆍ경쟁에 대한 분노를 선언한 다음, 우리는 실제로는 개량기획에 올라있는 낡은 경쟁제도, 자유주의화된 원칙에 입각한 빈민 구제법 바스티유를 손아귀에 넣는 것이다 ! 우리가 이런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프랑스사람들 역시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던 것이다. (대륙에서의 사회개혁의 전진, 1843, MㆍE전집 제1권, pp.525~527).
이에 뒤이어 3명의 위대한 공상적 사회주의자가 나타났다. 먼저 쟁시몽 —— 그에게는 프롤레타리아적인 경향과 더불어 부르주아적인 경향이 아직도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남았다. 다음은 푸리에와 오웬이다. 오웬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하여 야기 된 제 대립에 자극받고, 계급적 차별을 없애려는 제안을 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유물론을 직접적인 전환으로 하여 체계적으로 전개한 이론이다. 이 세 사람에게 공통되는 점은 그들이 그간 역사적으로 태어난 프롤레타리아를 이해관계 대표자로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계몽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어떤 특정계급을 ‘우선’ 해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를 ‘곧장’ 해방시킬 것을 바랐다. 계몽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성과 영원의 정의라는 왕국을 실현시킬 것을 바랐다. 그러나 그들의 왕국과 계몽학자 들의 그것과의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이들 계몽학자들의 제원칙에 따라서 조직된 부르주아적 세계 역시 불합리하고도 부정한 것이다. 따라서 봉건제도와 그 이전의 모든 사회상태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 역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이었다. 참된 이성.과 정의가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하지 못한 것은 이제까지 그것을 전적으로 올바르게 인식한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이제 그런 천재가 나타나 진리를 알아낸 것이다. 이제 이 천재가 출현하여 이제야말로 그 진리가 인식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발전의 연관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아주 요행에서였다. 천재는 500여년 전에도 똑 같이 생겨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태어났다면 인류는 500년간의 오류와 투쟁 그리고 고뇌는 생략되었을 것이었는데. (반듀링론, 1877, MㆍE선집 제14권, pp.88〜89).
이들 공상주의자들이 공상주의자로밖에는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아직 미발달한 시대에는 이런 주의자가 되는 이외에는 별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새 사회의 모든 요소를 부득이하게 머리속에서 조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제요소가 낡은 사회 그 자체 내에서 아직 만인의 눈에 명료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들이 그의 새로운 건설구도를 묘사함에 있어 이성에 호소하는데 만 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아직 같은 시대의 역사에 호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상, P.453).

카우츠키 :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대중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랫동안 독립된 생명활동을 하지 못한 그대로였다. 사회주의의 최초의, 그리고 당시의 유일한 근원은 상층계급속의 자선가가 가난한 사람이나 곤궁한 사람들에 대하여 느낀 동정심이었다. 사회주의는 이와 같은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가장 대담하고 가장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근원이 생산수단의 사유제에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였는데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런 인식에서 마지막 결론의 도출을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적 자선의 가장 전형적인, 가장 투철한, 가장 대규모적인 표현이었다. 당시 사회주의자가 목표실현을 위해 투쟁을 호소할 만큼 계급적 이해관계는 아직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상층계급속에 있는 이상주의자의 정열과 동감을 구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쪽에서는 사회주의적 공동체에 대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끔 그 구도(構図)를 묘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있는 빈곤을 강렬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이런 정열과 동감을 획득하려고 했다. 그들은 투쟁으로써가 아니라 평화적인 설득에 동조하게 될 부자와 권력있는 사람들이 빈곤의 근본적인 완화와 이상사회 실현을 위해 그들의 재산을 내놓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알고 있는바와 같이 이 시기의 사회주의자들은 백만장자와 귀족들에게 헛된 기대를 걸고, 그들의 관대한 마음이 인류를 구제해 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에르푸르트강령 해설, 1904, 세계대사상전점 14, 하출서방, 동경, p.149).
부르주아적ㆍ공상적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적ㆍ공상적 사회주의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과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때로는 프롤레타리아적 공상주의자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계급투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설사 참가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종국적으로 결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를 추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무정부주의운동(이 말은 여기서는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적 공상주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은 그것이 대중운동으로 되고, 실제적인 계급투쟁으로 발전시킨 곳에서는 어디서나 얼핏 보기에 급진주의처럼 보여도, 조만간에 반드시 길드(gild)화된 단순한 조합주의, 또는 단순한 산업조합주의로 전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상, P.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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