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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 농민전쟁] (〔甲午農民戰爭〕)

19세기에 들어서자 구미(歐美) 자본주의 열강이 한반도 주변에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1867년,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강요에 의해(강화도조약)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권에 폭력적으로 편입되었다. 1894년까지의 단계에서 일본 자본은 식민지를 요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對) 한국 무역을 지렛대로 해서 원시적 축적을 달성하고 이것을 군국주의의 군사력에 의해 보호ㆍ육성해 왔다. 한편 국내적으로 봉건 체제는 만성화된 제정 파탄과 국내적 봉건 관료, 즉 지주 계층의 무법적이고 가혹한 농민 수탈로 인해 진주 민란 이래로 빈번한 농민 봉기를 유발시켰다. 그런데 민 씨 일파에 의한 세도 정치는 심지어 양반 계층 일반의 이익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단지 외세 의존과 매관의 성격을 아주 강하게 띠었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새로운 진보와 혁신을 목표로 한 투쟁이 벌어지게 되니 이것이 곧 갑오 농민전쟁이다. 동학사상을 종교적 외피(宗敎的 外皮ㆍeine religiõse Decke)로 한 갑오농민전쟁은 봉건적 억압과 외래 자본주의 침입이라는 상황에서 농민과 천민, 그리고 일부 몰락 양반의 일정한 계급적 이해ㆍ욕망ㆍ욕구를 주체적 요인으로 갖고 있었다. 갑오 농민전쟁을 그 이전의 농민 봉기와는 달리 지역적 봉기를 동학 조직과 결합시켜 지역적 분산을 극복하였다. 계급적 요구 실현을 위한 무력 투쟁과 종교운동이 농민이라는 동일한 기반 위에서 결합되었던 것이다. 동학사상이 당시의 피억압 계층의 동조를 얻을 수 있었던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이념이 계급적 요구와 결합함에 따라서 '후천개벽(後天開闢)'에 의해 지상 천국이 실현된다는 종교적 환상과 그 실현 방식으로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비폭력주의를 고집하는 동학 상층 간부 사이에 갈등이 생겨 결과적으로 갑오 농민전쟁은 상층 간부의 강한 영향 아래 있던 충청도(북접)가 아니라, 봉건적 모순이 가장 심한 전라도(남접)를 중심으로 상층 간부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시작되어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고 전면적 농민전쟁이 되었던 것이다. 1894년 전봉준이 지도한 고부민란을 시발점으로 하는 갑오 농민전쟁은 동학교도 운동이 삼례 집회 및 복합상소(伏閤上疏)의 '교조신원(敎祖申寃)'에서 보은 집회의 '척외양(斥倭洋)'으로 발전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의 반봉건적(半封建的)이념은 후기의 반봉건ㆍ반제(半封建ㆍ反帝)의 이념으로 발전되었다. 즉 갑오 농민전쟁은 고부 민란에서 본격적 농민전쟁이 비롯되는 제 1단계의 즉자적인 반봉건적 농민 봉기에서 제 2단계(고부ㆍ태인의 봉기에서 전주 입성에 이르는 농민군의 승리 전진 단계). 제 3단계(전주 화약 후 집강소에서의 지방자치단계), 제 4단계 (농민군 재기에서 공주 전투를 거쳐 후퇴하는 단계)의 반봉건적 ㆍ반외세적인 전반적 농민전쟁으로 확산ㆍ발전하게 된다. 비록 갑오 농민전쟁은 ①봉건정부의 매판성과 부패로 인한 외부세력의 개입. ②'갑오개혁'이라는 불철저하고 한계 있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한 조선 사회 내부의 분열, ③북접과 남접의 대립으로 인한 농민군 내부의 분열, ④조직적 지도 체제의 미비(未備)들로 인해서 좌절되었지만 반외세 민족 자주 이념은 아직까지도 사상적ㆍ실천적 과제로 남아 있다. ⇒ 동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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