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 家禮] (Family rite)
가(家) 단위의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규범의 례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사에서는 주자(朱子)가 소종가(小宗家)의 범위 내에서 관혼상제의 일상적 의식을 통해 표현되는 제 관계의 규범을 정리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일컫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예(禮)는 고대부터 친족집단 내의 가부장제적 존비(尊卑) 질서의 규정으로부터 발생하여, 군신관계나 국가간 외교와 같은 통치계층간의 질서규범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중시되어 왔다. 예는 특히 유가(儒家)에 의해 정치원리로서 중시되면서 이론적으로 정교해졌는데, 주로 정치의 근본이 되는 질서원리로서의 면과 신체동작 및 대인관계의 구체적 규범으로서 의절(儀節)이라는 면의 중층적 구조로 이론화하고 양자의 관계를 설명해 내고자 하였다. 점차 구체적 의식절차보다는 그 배후의 인간 생활을 규율하는 규범, 나아가 사회·문화를 관통하는 보편적 도덕의 양상과 그 존재의 근거를 묻는 예의 관념이 중시되었다. 중국 후한(後漢) 이후로 유교가 국교로서 권위를 가지면서 경학에 근거한 제도가 정비되었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통치 질서를 뒷받침하는 예제 연구와 이를 토대로 한 의례제도가 정비되었다. 황제권 행사를 위해 군신간의 상하존비를 규정한 예제가 종횡으로 구사되었고, 예속(禮俗)의 의칙을 확장한 조정의 전례 및 의절이 매우 번잡해졌다.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 「여복지(輿服志)」 등 정사에 전하는 지(志)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예교제도의 실상을 전해 주며, 육조시대의 『진례(晉禮)』 및 당의 정관(貞觀), 현경(顯慶), 『개원례(開元禮)』 등 예전 편찬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시기 국가 예전의 활발한 편찬에도 불구하고 예가 지배층 내부의 상하간·수평간 질서를 규제하는 데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구체적인 의절에 얽매이면서, 정치의 근본이 되는 질서원리로서 본질적 측면에서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송대에는 삼례(三禮), 즉 『주례(周禮)』, 『예기(禮記)』, 『의례(儀禮)』의 고례(古禮)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문제제기 속에서 활발해졌다. 우선, 조정의 관료기구와 그 직장을 서술한 행정법전의 성격을 지니고 당대(唐代)까지 관제 개혁이나 관료기구의 정비에 활용되어 왔던 『주례』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가운데 국가사회의 신질서를 모색하였다. 동시에 보편적 도덕 규범으로서 예의 본의를 되살리면서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만들어 가기 위한 예제 연구와 실천적 규범의 제시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송대 학자들의 예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남송의 주자는 개인의 도덕적 본성의 회복을 이상적 국가 사회질서를 만들기 위한 토대로 삼으면서 예에 대한 이론적 연구와 일상에서의 실천 방법을 제안하였다. 주자학적 통치이념을 표현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 『예기』에서 독립되어 주요 경서로 다루어졌고, 주자 생전에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와 『가례(家禮)』는 주자 예학의 지향을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으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만들어 가고자 했던 조선 등 동아시아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주자가례』가 소개되었고, 이상적 국가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한 토대로서 가(家)와 향촌의 질서를 개신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정몽주를 비롯한 신흥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비롯하여 『주자가례』와 『강목(綱目)』 등을 수용하거나 이를 강조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 주도세력들도 국가체제의 모범을 『주례』에서 구하며, 이를 기준으로 조선의 건국을 체계화하여 나가는 한편,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풍속 교정을 시도하였다. 중국 당대 이후의 예제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나름의 유교적 예제를 시행해 왔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1402년(태종 2)에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치하여 고려·당·송의 예제를 연구하고 명(明)의 『홍무예제(洪武禮制)』 등을 참작하여 조선의 예제를 체계화하였다. 세종대에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고례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키는 가운데 국가의 오례 체계를 정비하여, 결국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를 거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귀결되었다. 『국조오례의』는 주례 춘관에 토대한 오례[길(吉)·흉(凶)·가(嘉)·빈(賓)·군(軍)]의 체계로서 국가의 장에서 실천해야 할 의례를 규정하는 한편, 주현제의(州縣祭儀)·향례(鄕禮) 등이 수록되어 있어 사대부와 서인까지 포괄하는 국가 주도의 예치질서의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한 예제 정비의 작업이 진행되는 한편, 주자의 예학 실천을 통해 사대부와 민(民)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나가려 하는 시도도 지속되었다. 소학(小學)을 보급하여 수신의 방법을 몸에 익히고, 향약(鄕約)을 보급하고 향례(鄕禮)를 실천하면서 향촌의 질서를 안정화하려는 노력과 함께, 『주자가례』를 보급하고 이에 의거하여 가(家) 단위에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례 생활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주자가례』에 의거한 사례(四禮)의 실천 가운데 제례(祭禮)와 상례(喪禮) 부분에서의 변화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진되었다. 가묘(家廟)와 사당(祠堂)을 통해 유교적 제례를 사대부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실천하도록 독려하였다. 다만, 제사를 지내는 대수에는 관품에 따라 차등을 두었는데, 이는 큰 원칙상 사대봉사(四代奉祀, 고조, 증조, 조부, 부의 사대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의 의리적 명분성을 인정하면서도 생활 여건상의 부담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3년상 제도도 사대부들에게는 강제적으로 적용시키고, 서인들은 감등하여 상례를 치르도록 했다. 일상의 관습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전통적으로 장례의 시행을 돕던 경사(經師) 등의 제도를 활용해 가면서 『주자가례』에 따라서 상장례를 실천할 수 있게 했다. 3년상을 행할 때 발생하는 경제적인 문제를 국가의 보조를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도 시행되었다. 성종대에 들어오면서, 군사의 경우 원하면 3년상을 치룰 수 있도록 허용하였고, 점차 일반민까지 3년상 제도를 실천하게 하였다. 혼례와 관례에서는 상대적으로 『주자가례』의 보급이 느렸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혼례의 중요성과 친영제(親迎制)의 의미에 대해 강조하는 등 일찍부터 기존 남귀여가혼(男歸女嫁婚, 남자가 여자 쪽의 집으로 장가 드는 혼례 방식) 제도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왕실에서조차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세종대에 왕실이 먼저 친영제도를 시행하고 사대부가 본받도록 했으며, 중종대에는 국왕의 혼례에서도 친영례를 시행하도록 하면서 차츰 전통적인 남귀여가혼을 대체하여 친영례가 정착되어 갔다. 성리학적 예제를 정착하기 위한 국가 주도의 노력이 이어지는 한편, 조선의 현실을 고려하여 가례를 실천하려는 사대부 지식인들의 노력도 있었다. 가례를 간편한 실용서로 정리하여 보급하거나, 가례의 정신을 살리면서 조선의 현실을 감안하여 일상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한 가례서들이 편찬되었다. 예학에 대한 연구도 더욱 심화되어, 각 학파에서 예설이 정립되어 가는 가운데 국상(國喪)에서의 복제(服制) 문제를 두고 예학상의 해석 차이가 정치 문제화한 예송(禮訟)을 겪기도 하였다. 예송에서의 견해 차이를 가례의 종법사상을 고수하면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천하동례파(天下同禮派)와 이를 변칙적으로 적용하려는 왕자례부동사서파(王者禮不同士庶派)의 입장으로 구분하거나, 사족정치론을 대변하여 신권 중심의 정치질서를 수립하려는 서인 예학과 삼대의 질서를 담은 고례를 이상화하여 국왕 주도의 정치질서를 수립하려는 남인 예학이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입장, 왕례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보편주의 예학과 왕례의 특수성을 용인하는 분별주의 예학으로 나누고, 보편주의 예학은 16세기 이후 『주자가례』 중심의 새로운 예학 경향을 반영하였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주자가례』를 도입하고 적극적으로 보급하려는 노력으로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향촌 사회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선 친족제도가 내외친이 망라되는 양계친족에서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부계친족으로 변화하며, 이에 따라 남귀여가혼이나 모계친족과의 관련성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대신하여 제사, 상속 및 분배상에서 장자우대의 경향, 족보에서 친족 수록범위 축소, 동성으로 국한된 입양제도, 동족 마을의 형성 등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가례는 몇몇 선구적인 지식인들이 성리학적 방법에 의해 일상을 개조하려는 차원의 운동으로서가 아닌, 사대부에서 민(民)에 이르기까지 생활 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예교가 봉건사상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전통적 세계관 및 가족제도와 분리될 수 없는 유교의 예 사상은 사회의 근대화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비판받았고, 산업화와 함께 전통적인 친족관계가 파괴되면서 기반을 상실해 갔다. ■ 김지영 [참고문헌] 고영진, 「조선중기예학사상사」(한길사, 1995). 도가와 요시오·고지마 쓰요시, 김석근 외 옮김, 「禮」, 『중국사상문화사전』(민족문화문고, 2003). 마르티나 도이힐러, 이훈상 옮김,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아카넷, 2003). 小島毅, 「中國近世における禮の 言說』 (東京大學出版會, 1996). 출처 : 『역사용어사전(Dictionary of Historical Terms)』,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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