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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동양) 革命] (Revolution)

1. 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과 혁명
‘혁명’이라는 한자 용어는 고대 중국의 유가(儒家) 경전에서 유래되었다. ‘천명(天命)을 바꾼다’는 의미의 ‘혁명’이 정치적 함의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역경(易經)』에서부터였다. 즉 『역경』에서는 하(夏)・은(殷)・주(周) 왕조의 교체를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혁명’으로 표현하고, 하늘과 사람에게 순응한 결과로 봄으로써 그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혁명의 의미를 좀 더 강조한 것은 맹자였다. 군주의 도적정치인 왕도정치를 주장했던 맹자는 인의(仁義)를 저버린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을 죽인 것은 군주를 시해한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무도한 왕을 바꾸는 일, 곧 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혁명의 함의가 서구의 정치적 체제 변혁(revolution)이라는 의미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청말 개혁론자들에 와서였다. 예컨대, 대표적 개혁론자인 량치차오(梁啓超)는 무술변법(戊戌變法) 실패 직후 일본에 망명한 다음 쓴 글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를, 전통적 왕조교체의 의미를 떠나 서구적 정치체제의 변혁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기 시작하였다. 이때 량치차오가 쓴 혁명은, 물론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개념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니, 그것은 왕정복고의 메이지 유신을 유신혁명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혁명의 폭력적 정부 전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따라서 혁명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가진 것이었다.

혁명을 정치적 혹은 사회・경제적 체제변혁의 의미로 한정해서 말할 경우,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의 근현대 역사 속에서 혁명을 논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영국의 인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가 시작되는 17세기 이후부터 중국과 일본・태국을 제외한 아시아의 모든 국가와 민족들이 서구 열강 내지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자생적 변혁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국가적 독립이 최대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식민당국에 의한 체제변혁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군주제 체제로부터 공화제로의 체제개혁이나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 체제로의 개혁과 같은 자생적인 혹은 내재적인 체제변혁의 기회는 주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민족적 독립운동 자체가 체제적 변혁을 수반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독립운동 과정 자체를 (민족)혁명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경우 대개가 공산주의 운동 내지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850년대 말부터 1860년대에 걸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베트남(越南)의 경우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국가적 독립을 쟁취하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러시아와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강력한 지원 아래 1930년에 만들어진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와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지만, 베트남의 경우처럼 민족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가지지는 못했으며, 이런 점에서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은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은 1945년 종전 이후 식민지배를 회복한 프랑스를 상대로 끈질긴 독립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계속하여, 1954년 결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의 독립정부가 북부 베트남에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에서 철수한 프랑스에 이어 남부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한 미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60~1975년 계속되었지만, 결국 호찌민(胡志明)이 지도하는 공산주의 통일정권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베트민과 베트남 공산당의 이러한 성공의 배후에는 토지혁명을 위주로 하는 공산주의적 혁명이 들어 있었으니, 말하자면 베트남의 민족독립운동은 공산주의 혁명과 동시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1990년 소련의 해체와 공산체제의 붕괴는 공산주의 혁명의 역사가 가지는 의미를 크게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베트남의 경우에도 1986년 이후 이른바 도이머이(쇄신) 정책이라고 하는 시장경제 체제로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인도차이나 혹은 베트남의 근현대 역사에서 차지하는 공산주의 혁명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2. 근현대 중국의 혁명
아시아의 다른 국가나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또한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았지만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경우는 따라서 불평등조약 체제의 청산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국가적 독립 쟁취가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의 일차적인 조건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정치적・사회경제적 혁명의 시도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2000년 이상 유지되어 오던 황제체제의 전복을 통하여 공화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청말에 등장한 이른바 혁명파에 와서 나타난다. 혁명파의 대표적 지도자 쑨원(孫文)은 서구 혁명론의 영향을 받아, 청조 중심의 개혁을 통해서는 중국을 망국의 위기에서 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청조의 타도, 곧 군주제의 타도를 구망(救亡)의 선결조건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공화혁명론의 대두 이후부터 20세기 후반까지 거의 1세기에 걸쳐 중국은 공화혁명과 국민혁명, 공산혁명,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혁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100여 년의 중국 역사를 ‘혁명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중국이 장기간에 걸쳐 이러한 혁명의 와중에 들어가게 된 것은, 중국이 당면한 국내외 위기 자체가 엄중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위기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원래의 강대국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조급함 또한 강하게 작용했던 때문이었다.

3. 공화혁명(신해혁명)
혁명파의 정치적 주장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이념 위에 선거와 의회를 통한 국민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입헌공화제의 실현을 골자로 한다. 그런데 이들의 공화 주장은 사실 부당한[異民族]지배체제인 청조의 타도[反淸革命]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의미의 혁명론을 부분적으로 계승하는 것이었다.

신해혁명을 자본가 계급이 주도한 자본주의 체제를 향한 혁명, 곧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는 입장은, 1930년대에 마오쩌둥(毛澤東)과 중국공산당 측에 의하여 제기된 이래 대륙 학계의 정통적 시각으로 자리 잡아왔으며, 일본 학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이른바 신해 부르주아 혁명설에 대한 학술적 비판이 제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결국 신해혁명의 역사적 평가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 주체세력의 범위와 성격, 그리고 그 이념적 실제적 지향이 어떠한 것이었는가의 문제이다. 1905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조직된 중국혁명동맹회로 대표되는 혁명파가 자본가 계급(부르주아) 출신인지, 그리고 이들의 정치적 주장이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뿐만 아니라 신해혁명 과정에서 혁명파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입헌파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경우, 혁명파가 곧 혁명 주도세력이었다고 볼 수만도 없다. 거기에다 청조에 대한 타도 주장이 공화제에 대한 지향이라는 측면보다는, 일차적으로 이민족 지배 곧 만주족 지배를 반대 [反滿 혹은 反淸]하는 민족주의 주장과 연결되어 제기되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해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단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청조 멸망 이후 새로 건립된 공화국이 실제적 기반을 갖지 못한 채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한 군주제 복귀 시도와 군벌(軍閥)들의 발호로 이어졌다는 사실로 본다면, 그리고 이러한 혁명이 좌절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공화제의 기초가 된다고 할 ‘국민’들의 공화의식이나 공화의식을 기반으로 한 정치참여가 없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신해혁명의 실제적 목표였다고 할 공화체제의 건립은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혁명의 결과로 2천 년 이상 지속되어 온 왕조체제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를테면 신해혁명은 공화체제의 수립을 정치적 목표로 제시한 ‘공화혁명’이었지만, 그 단계에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해혁명을 ‘미완의 공화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19년 5월의 반일 학생시위 사건인 5・4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5・4 운동은 좌절된 공화혁명 곧 신해혁명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신해혁명에서 결여되었다고 본 국민들의 공화의식을 ‘정신혁명’ 곧 의식혁명을 통하여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을 그 목표로 제시하고 있었다. 신사상의 수용이나 신문학의 등장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5・4 운동이 문화운동으로서의 측면을 강하게 가진다고 하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치적인 측면에 주목해서 볼 경우 5・4 운동은 공화제의 진정한 기반이라고 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주체로서 공화의식을 가진 ‘국민’을 창출해 내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해혁명 단계를 제도로서의 공화제를 정치적 개혁의 목표로 제시한 첫 단계의 공화혁명 [제1차 공화혁명]으로, 그리고 5・4 운동 단계를 공화제의 실질적인 내용을 채우는 둘째 단계의 공화혁명 [제2차 공화혁명]으로 파악해 보려는 관점도 제기되고 있다.

4. 국민혁명
1924년 1월의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공(國共)간의 합작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이후부터 1928년 6월의 난징 국민정부의 정식 성립 시기까지 중국국민당을 주축으로 하여 전개된 일련의 변화를 국민혁명이라고 부른다. 국민혁명은 광범한 정치・사회・경제적 변화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봉건체제에 대한 반대 [反封建]와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反帝]를 일차적인 목표로 내세웠다. 실제로 국민혁명의 진전 과정에서 반봉건이라는 목표는, 당시 각 지역에 할거(割據)하고 있던 군벌들을 타도하고[反軍閥] 영토적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반제의 목표는 아편전쟁 이래로 각 열강들과 맺었던 불평등조약을 철폐하고 새로 평등한 조약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였다.

군벌의 타도를 통하여 전국을 통일하려는 노력은 1924년 6월에 창설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련의 재정적・군사적 지원 아래 창설되고 운영되었던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의 ‘이념(주의)’에 투철한 젊은 장교들을 대거 배출하였고, 이들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국민혁명군은 1926년 7월부터 시작된 북벌(北伐) 전쟁을 통하여 급속하게 중국을 통일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7년 3월까지의 1차 북벌에서는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을 포함한 양쯔강(揚子江) 이남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어서 1928년 4월부터 1928년 6월까지 전개된 2차 북벌에서는 베이징(北京), 톈진(天津)을 포함한 화북(華北)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928년 12월에 동북(東北) 군벌 쟝쉐량(張學良)의 역치(易幟) 선언으로 전국이 국민당의 지배 아래 들어오는 ‘통일’을 이루었다.

1912년 청조의 붕괴 이후 군벌들의 발호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몇 개의 성(省) 혹은 각각의 성 단위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통일한 것은 국민혁명의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북벌 과정에서 급속하게 이루어졌던 북벌군의 확대편성[擴編]에서 잘 드러나듯이, 북벌에 의한 통일은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즉 북벌 개시 초기에 10만에 불과했던 북벌군의 규모는 북벌군이 상하이・난징 지역으로 진출하던 1927년 3월 초에 가서는 40여만으로, 그리고 베이징을 점령하던 1928년 6월에 가서는 약 200만 명 이상에 달하였으니, 이를테면 북벌 완성에 의한 전국 통일은 군벌 군대의 국민혁명군에의 표면적 통합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 지휘체계나 재정에 있어서는 중앙정부의 통제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북벌 완성 단계, 곧 1928년 단계의 통일은 실질적인 통일이 되기에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과 함께 국민혁명의 또 다른 목표로 제시되었던 ‘반제’는 국민혁명의 진전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로 고양된 민중운동의 하나로 성장하였으며, 일부 지역[漢口, 九江]에서의 조계(租界) 회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국민혁명군에 의한 ‘혁명외교’의 성과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반제의 성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통일된 중국의 중앙정부, 즉 난징 국민정부의 성립 이후를 기다려야 했다. 실제로 1929년 이후 국민정부와 각 열강 사이에 불평등조약 개정을 둘러싼 외교적 협상이 본격화되었고, 그 결과 1930년대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열강들과 기왕의 불평등조약을 폐지하고 새로운 평등한 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를테면 국민혁명을 경과하면서 국가적 독립을 목표로 하는 불평등조약 철폐(개정)운동[廢約運動] 이 실현될 수 있는 실질적 기반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니, 이런 점에서 국민혁명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북벌기간 동안 크게 고양된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배외운동(排外運動, 보이코트 운동)을 비롯한 각종 민중운동은, 신해혁명에서부터 제기되었던 ‘각성된 국민’의 정치적 참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민혁명이 가져온 주목할 만한 변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국민혁명의 전 기간을 통하여 전개된 국공간 혹은 좌우간 정치적 대립과 함께 군사적 통일 곧 북벌을 중시하는 군사노선과 민중운동의 발전을 중시하는 민중운동 노선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결국 ‘후방안정론(後方安定論)’을 내세운 군사노선이 민중운동 노선을 전면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 민중운동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민혁명을 통하여 성립된 난징 국민정부의 정치적 체제를 흔히 훈정체제(訓政體制) 내지 당국체제(黨國體制)로 부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1928년 난징 국민정부의 성립을 중국에서의 ‘국민국가’의 성립 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독립적인 개인으로 구성되는 시민사회’로 상징되는 서구의 국민국가 개념에 비추어 볼 때, 한 정당인 국민당의 정치적 독점체제인 당국체제는 국민국가라고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훈정을 매개로 하는 이러한 당치(黨治)체제는 (논증되지 않은) 낙후된 국민의 정치적 의식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를테면 국민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주체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훈련의 대상으로만 상정되어 있고, 따라서 국민당의 이념과 노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추종만이 강조되고 있었다. 인민을 훈도(訓導)와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당치체제의 이러한 입장에는, 전통적 황제지배체제 아래에서 기능했던 이른바 위민적(爲民的) 수준의 민본주의의 요소가 적지 않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또 정치적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짜여진 중앙의 당치체제는 전통적 지배계층인 신사층(紳士層)을 통한 황권(皇權)의 작동방식과 마찬가지로, 유식자(有識者, 지식 엘리트)를 통한 인민 지배의 한 방식으로 이해될 여지 또한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당국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 군사력과 그에 대한 통제력인 군권(軍權)에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그런 점에서 1920, 1930년대 중국의 정치와 혁명은 군사력에 압도되어 있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고, 바로 이 점이 난징 국민정부의 정치체제를 국민주권이 실현된 단계의 국민국가로 보는 데 일단의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국체제가 가지는 국민국가로서의 이러한 부정적 측면들이, 당국체제를 국민국가와는 동떨어진 전근대적 정치체제의 하나로 보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볼 수도 없다. 이런 입장으로부터 국민당의 당국체제를 국민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나타난 일종의 과도기로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중국적 국민국가’라는 개념으로 표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 공산혁명
1921년의 중국공산당 창당은 5・4운동 이래 사상운동의 차원에 머물러 왔던 공산주의 운동을 본격적인 정치운동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창당 자체가 코민테른과 소련의 강력한 지원과 영향 아래 이루어졌던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창당 이후 전개된 공산주의 운동 또한 사실상 코민테른과 소련의 강력한 영향 아래 진행되었다.

1924년 1월의 국민당 일전대회 (ー全大會)를 계기로 출범하게 된 제1차 국공합작과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 국민혁명은 공산당의 정치적 기반을 크게 확대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국민혁명의 과정에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婦女運動]을 비롯한 각종 민중운동이 크게 성장하였는데, 이러한 민중운동 가운데 일부가 공산당의 주도아래 있었고, 이들 민중운동을 통하여 공산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27년 4월의 4・12 정변은 공산당의 지도아래 있던 상하이 지역의 노동운동과 장제스(蔣介石)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 곧 국민혁명군이 국민혁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충돌한 것으로,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합작이 사실상 결렬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12정변 이후 공산당의 활동은 불법화되어 도시에서는 지하운동으로서, 그리고 농촌에서는 독자적 정권수립운동, 곧 소비에트 운동으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강산(井岡山)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졌던 장시(江西) 소비에트와 장정(長征) 이후 산시(陝西)・간쑤(甘肅)・닝샤(寧夏) 지역의 서북 변방에서 만들어졌던 이른바 ‘산간닝(陝甘寧)소비에트’는 농촌 지역에서의 소비에트 건설운동의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1936년 12월 시안(西安)에서 발생한 장쉐량(張學良)에 의한 장제스 감금사건, 곧 서안사변은 여러 차례에 걸친 공산군 토벌전쟁[剿共戰]의 결과로 거의 소멸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공산당 세력의 명맥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서안사건의 결과 출범하게 된 국공간의 두 번째 합작[제2차 국공합작]은, 안내양외(安內攘外) 정책을 추진해온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의 침략에 먼저 저항하기 위하여 공산당에 대한 토벌전쟁을 뒤로 미루도록 했으니, 그런 점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은 공산당에 재기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제2차 국공합작 기간을 통하여 공산당은 여러 지역에서 소비에트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이러한 소비에트를 기반으로 하여 군사력도 크게 증강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퇴 이후 소련군의 동북 점령과 이후 소련군의 비호 아래 진행된 공산군의 동북 진출은, 1946년 이후 벌어진 국공간 내전에서 공산당군이 국민당 군대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에다 국민당 정권의 분열과 부패, 무능은 공산당 측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으며, 공산당에 의한 토지개혁의 추진 또한 농민들의 지지를 국민당으로부터 공산당 쪽으로 옮겨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만들어진 공산당 정권, 곧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과정은 도시 노동자를 중심세력으로 하는 러시아식 공산혁명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중국의 공산혁명은 소련을 비롯한 외부세계의 강력한 영향 아래 진행되었지만, 그 성격 면에서는 소련식 공산혁명보다는 중국의 전통적 농민반란과 상통하는 측면이 더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9년 10월 성립한 공산당 정권은 적어도 그 성립 단계에서는 공산정권, 곧 프로레타리아 계급의 배타적인 정권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었고, 공산주의 체제의 실현 그 자체를 당장의 목표로 삼을 수도 없었다. 건국 직전인 1949년 9월에 개최된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채택된 ‘공동강령(共同綱領)’에서는 인민민주통일전선(人民民主統一戰線)의 수립을 건국의 목표로 내세워 노동자, 농민, 소자본가, 민족자본가 계급의 연합정권을 건국의 기본 노선으로 제시하였다. 경제체제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와의 장기적 공존을 통하여 공업화를 이룩하고, 그 뒤에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이 새 정권의 목표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공산당 정권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회・경제적 체제는 그 이전 시기, 곧 국민당 시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최근의 연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1949년 중공 정권의 성립을, 국민당 통치에서부터 공산당 통치로 정권의 담당자가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공산주의 체제로의 변화를 가져온 ‘공산주의 혁명’으로 보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1955년부터 시행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부터 제기된 사회주의의 조기건설[社會主籬設總路線] 주장은, 말 그대로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을 당면의 목표로 설정했던 건국 초의 구상을 전면 수정하는 것인 동시에, 현실적 여건을 무시한 ‘사회주의의 강행’이었다. 자본주의적 준비기간을 뛰어넘는 사회주의 실행 단계로의 일대 도약, 곧 ‘대약진(大躍進)’은 따라서 기왕의 공산주의 이론체계를 전면적으로 뛰어넘는 하나의 실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약진과 대약진의 실패를 무마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계급혁명의 계속’ 주장은 문화대혁명 (1965~1976)이라는 전대미문의 대혼란[十年動亂]을 가져왔던 것이니, 그것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아무런 기반이 없는 정치적 모험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강행의 대실패는 사실 공산당 정권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실패였다. 1980년대 이후부터 본격화된 ‘개혁개방’정책과 그에 이은 시장경제의 발전에 대하여오늘날 중공 정권은 ‘중국적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사회주의 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 경제가 시장경제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런 까닭에 공산혁명과 사회주의의 실현을 내건 일련의 노력들을 하나의 시행착오로 보는 부정적 평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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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상, 『중국의 국민혁명과 상해학생운동』 (혜안, 2004).
클라이버 크리스티, 노영순 옮김,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심산 2005).
한일역사가회의조직위 편, 『반란인가? 혁명인가?』 (새미, 2008). 

출처 : 『역사용어사전(Dictionary of Historical Terms』,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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