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라비 법전] (Code of Hammurabi)
고대 문명이 남긴 법전의 수는 적지 않지만, 이 법전처럼 보존 상태가 양호한 예는 그리 흔치 않다. 함무라비 법전은 기원전 18세기에 바빌론을 수도로 삼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통일하는 위업을 이룬 고 바빌로니아 왕조의 함무라비 왕이 집대성한 것이다.
1901년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구스타브 제키에(Gustave Jequier)가 고대의 엘람(Elam), 즉 이란의 후제스탄(Khuzestan)에서 그 법전을 기록한 석비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기원전 12세기경 바빌론을 침입했던 엘람인에게 탈취되었던 것이라 알려져 있다. 높이 2.25m의 섬록암(閃綠岩) 재질의 이 석비는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상단 약 65cm에는 함무라비 왕이 법과 정의의 수호신인 태양신 사마시(Samashi)에게서 법전을 받고 있는 모습이 부조(斧藻)되어 있다. 그 아래쪽 160cm에 법전이 아카드어로 새겨져 있는데, 크게 전문(prologue), 법조문, 그리고 후기(epilogue)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과 후기는 함무라비가 온 사계(四界), 즉 온 세상의 정복자요 통치자이며, 메소포타미아 여러 도시의 수호신들의 가호를 받는, 정통성을 가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아누(Anu) 신과 벨(Bel) 신께서 신을 공경하는 고매한 자인 나 함무라비를 부르셔서 이 땅에 정의가 지배하게 하셨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법조문 가운데 약간의 훼손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282개 항이 확인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물론 완전히 새로운 창안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오랜 법전 편찬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 기원은 멀리 기원전 3000년기의 수메르(Sumer) 문명 정통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가시(Lagash)의 왕 우르카기나(Urkagina, B.C. 재위 2380~2360)의 법전, 우르(Ur) 제3 왕조의 통치자 우르남무(Ur-Nammu, 재위 B,C. 2047~2030), 에시눈나(Eshnunna) 시의 법전(대략 B.C. 1930), 이신(Isin) 시의 리피트-이시타르(Lipit-Ishtar) 왕이 제작한 법전(대략 B.C. 1870) 등이 주요한 선례들이다. 함무라비 법전에 혁신적인 요소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현재의 증거 상태로서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법전이 이처럼 과거 메소포타미아의 법전을 계수(繼受)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실정법으로서 기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 법전이 함무라비의 정통성을 선전하는 기념비로서의 의의를 더 강조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함무라비 법전이 후대 근동의 법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가령, 아시리아 법전이나 모세의 율법에서 그 뚜렷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의 법조문 내용을 좀 단순화하면, 크게 가족법, 재산권, 상법, 형법 및 법정에서의 절차 등의 범주로 구성된다. 법 규정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면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원시적 법제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소위 ‘동해 보복의 법 원칙 (lex talionis)’이다. 즉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끼친 손해나 상해와 동일한 양의 처벌 혹은 벌금을 규정하는 법조문들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만일 어떤 남자가 임신한 여성을 유산하여 사망하게 하면, 그 가해자의 딸을 처형한다.”[물론 신분 차에 따른 양형의 차이는 인정된다.] “만일 의사가 (시술 중에) … 타인의 노예의 눈을 잃게 하면, 의사의 손을 절단한다.”
[참고문헌] Bryant, T., The Life & Times of Hammurabi (Mitchell Lane Publishers. 2005). Driver, G. R, and J. C. Miles, The Babylonian Laws, 2 vols. (Oxford, 1952). Meek, Th. J.(trans.), “The Code of Hammurabi”, in J.Pritchard(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5)
출처 : 『역사용어사전(Dictionary of Historical Terms』,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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