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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종교개혁 宗敎改革] (Catholic Reformation)

가톨릭 종교개혁은 흔히 ‘반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역사적으로는 후자가 더 오래된 개념이다. 

1776년 독일의 법률가 요한 슈테판 퓌터(Johann Stephan Putter)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한때 개신교가 위세를 떨쳤던 지역에서 일어난 재가톨릭화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종교개혁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반종교개혁을 하나의 시대 개념으로까지 확립시킨 인물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였으며, 이후 이 개념은 독일 이외의 다른 유럽 국가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널리 수용되었다. 하지만 가톨릭 역사가들을 중심으로 이 용어가 프로테스탄티즘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측의 수동적인 대응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진행된 가톨릭 교회의 자체 개혁 노력은 외면해 버리는 가치 편향적 개념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런 반론을 수용해 1880년 빌헬름 마우렌브레허(Wilhelm Maurenbrecher)는 ‘가톨릭 종교개혁’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이 용어는 곧 가톨릭 역사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가톨릭 교회사가 후버트 예딘(Hubert Jedin)이 ‘가톨릭 개혁과 반종교개혁’이란 이중 개념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가톨릭 개혁이 15세기부터 에스파냐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진행된 가톨릭의 자체 갱신 노력을 일컫는 것이라면, 반종교개혁은 개신교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가톨릭의 교세를 회복하려는 제반 활동을 표현한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국의 일부 가톨릭 역사가들[예컨대, 존 오말리(john O’Malley)]은 가톨릭 종교개혁이나 반종교개혁 모두 개신교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면서, 대신 ‘근대 초기 가톨릭주의(early modern Catholicism)’라는 개념으로 16세기 이후의 가톨릭 역사를 서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가톨릭 종교개혁의 핵심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트렌토 공의회(Council of Trent)로서, 이를 통해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을 반박하고 가톨릭의 기본 교리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교회 내부의 폐단을 시정하려고 했다. 1530년대부터 로마 교황청은 교회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효과적인 개혁안을 마련하기 위해 추기경 및 고위성직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했고, 교황 파울루스 3세(Paulus III, 재위 1534〜1549)는 이탈리아 북부의 소도시 트렌토에서 1545년 공의회를 개최함으로써 향후 이루어질 내부 개혁의 토대를 놓게 되었다. 트렌토 공의회는 수차례 중단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1563년까지 지속되었는데, 크게 1기(1545~1547), 2기(1551~1552), 3기(1562~1563)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트렌토 공의회에서 결정된 주요 사항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구원의 진리는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에도 있다는 점과, 믿음과 더불어 선행도 구원의 필수 조건임을 명확히 했고, 종교개혁가들이 세례와 성찬 이외의 다른 성사(聖事)들을 거부한 것과는 달리, 성사의 수를 7개(세례, 성체, 견진, 고해, 혼인, 병자, 신품)로 확정지었다. 특히 성찬과 관련해서는 성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을 재확인함으로써 화체설을 거부하는 프로테스탄티즘과의 경계를 명확히 했다. 미사의 희생제의(犧牲祭儀)적 성격을 강조한 것도 프로테스탄티즘과 구별되는 부분이었다. 이 밖에도 교부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 c. 348-420)가 편찬한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e) 성경만을 교회의 정경으로 인정했으며, 연옥과 성인공경, 성상 및 성물, 면벌부(免罰符)의 효력을 인정했다. 또한 교회의 폐단으로 지적되어 온 성직 매매, 성직 겸직을 금지했고, 성직자의 독신제도 강화 및 성직자 자질 향상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 실시 등을 결의했다. 가톨릭 교회의 일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트렌토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이후 교황들은 라틴어로 된 통일적인 성무 일과서, 미사 전서, 교리문답서 등을 잇따라 반포하였다. 마지막으로 트렌토 공의회와 병행해서 가톨릭 교리에 위반되는 이단 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차단하기 위한 조처들이 취해졌는데, 교황 파울루스 3세가 1542년에 세운 로마 종교 재판소와 파울루스 4세(Paulus IV, 재위 1555~1559)가 1559년 공포한 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 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트렌토 공의회는 서방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을 회복하는 데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 가톨릭 교회에서 유효했던 종교적 실천적 조항들의 핵심 부분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가톨릭 종교개혁에서는 새로 설립된 수도회 조직들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52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테아티노 수도회와 카푸친 수도회와 같은 새로운 종단들이 창설되었고, 에스파냐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창설한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1540년 교황 파울루스 3세에 의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특히 가톨릭 종교개혁을 수행하는 주도적인 기구로 부상하게 된 예수회는 상급자에 대한 복종과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존재 이유로 삼음으로써 교황 직속의 가장 충실한 집단이 되었다. 예수회는 장기적이고 철저한 훈련을 통해 수많은 설교가와 교리문답 교사들을 배출해 냈고, 귀족과 통치자의 고해 신부로 활약하면서 이들에게 정신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예수회가 역점을 두었던 것은 교육과 선교 사업이었는데, 예수회는 수많은 고등 교육기관을 직접 운영하고 근대적인 교육 시스템(분반 체제의 도입이나 수업, 경연대회, 학생 간부 선출에서의 엄격한 성과위주 원칙의 준수 등)을 도입하는 것을 통해 신・구교 간의 교파 투쟁에서 문화적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다.

예수회는 한때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했던 유럽의 여러 지역들을 재가톨릭화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예수회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던 지역은 16세기 중반까지 지배계층과 도시민들의 대다수가 프로테스탄트였던 폴란드로서, 예수회는 16세기 후반기부터 설교, 목회, 빈민구호, 교육사업 등을 통해 이 나라를 독실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톨릭 교리문답서의 저자로도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의 예수회 수사 카니시우스(Peter Canisius)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여 가톨릭 교회의 세력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수회의 선교활동은 유럽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6세기에 들어와서 유럽의 무역로가 전세계로 확대되고,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지역으로 대거 진출하면서,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도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일찌감치 이들 지역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아메리카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벌였는가 하면, 로욜라의 동료였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는 인도를 거쳐 멀리 일본에까지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중국 명(明)나라에 머물면서 중국에 서양의 문물을 전해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또한 예수회에서 파견한 신부였다. 특히 그가 가톨릭 교리를 한문으로 풀어 쓴 『천주실의(天主實義)』가 17세기에 조선에 소개되면서 서학(西學)과 천주교가 전래되는 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예수회의 활발한 해외 선교활동은 간접적으로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르네상스기 가톨릭 교회 내부의 세속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는 완전히 일소되었으며,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의 등장으로 수세적인 입장에 몰렸던 가톨릭 교회는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16세기 중엽에는 유럽의 거의 절반이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100년 후에는 단지 1/5만이 계속 프로테스탄트로 남아 있게 된 것은, 폭력적인 종교전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가톨릭 종교개혁이 거둔 성과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해명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가톨릭 종교개혁은 가톨릭 국가들의 절대주의 확립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 가톨릭 교리 교육의 강화와 체계적으로 양성된 사제들의 적극적인 사목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 일반 평신도들의 신앙의 내면화는, 통일된 종교를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절대군주들의 노력과 맞물리면서 유순하고 순종적이며 규율화된 신민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었다.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 절대군주정을 완성한 루이 14세가 1685년에 낭트 칙령을 폐지하면서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반종교개혁 과정을 국가적 차원에서 완결지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국가와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게 된 가톨릭 교회는 결과적으로 자율성을 상실하면서 절대주의 국가에 점차 예속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참고문헌]
이영림, 「근대 초 유럽사회의 세속화와 신앙의 내면화」, 『경기사학』4(2000), pp. 177-206.
패트릭 콜린슨, 이종인 옮김, 『종교개혁』 (을유문화사, 2005).
한스 큉, 배국원 옮김, 『가톨릭교회』 (을유문화사, 2003).
황대현, 「16〜17세기 유럽의 교파화 과정에 대한 연구사적 고찰 : 사회적 규율화의 첫 단계로서의 교파화 과정 패러다임에 대한 독일사학계의 논의를 중심으로」, 『역사교육』100 (2006), pp. 293-321

출처 : 『역사용어사전(Dictionary of
Historical Terms
,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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