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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제 家族制] ()

가족과 친족을 구성하는 원리와 이에 근거한 보편적 관행 및 제도를 뜻한다.

 

가족과 친족을 구성하는 원리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부계(父系)와 모계(母系)이다. 이러한 분류는 근대 서구학계에서 성립한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도 수입되었다. 부계와 모계는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사회발전 단계를 가늠하는 지표로 간주되었는데, 19세기 후반 서구에서 유행한 사회진화론에서는 인류가 모계제에서 부계제로 진화했다고 판단하였다. 일본 학자들은 이 이론을 수용하여 식민지 조선의 발전 단계를 판단하는 도구로 이용하였다.


일본 학자들이 본 식민지 조선의 가족과 친족은 강력한 부계 원리에 의해 규율되었다. 즉 결혼은 처가 남편에게 소속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제사는 부계 후손이 부계 조상을 기리는 행사로 치러졌고, 적장자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여 대부분의 재산을 상속할 뿐만 아니라, 제사 및 이와 관련된 재산을 단독으로 상속하였다. 이러한 제반 관행은 적장자 중심의 가족 질서를 확인하고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 부계 원리에 따라 조직된 가족은 부계 친족집단으로 확대되어 부계 남성들은 같은 촌락에 모여 살다 같은 묘역에 묻혔다. 부계 남성들은 거대한 문중을 조직하여 전국적인 범위에서 동질감을 공유하였으며, 종산(宗山)과 종답(宗沓) 등의 공동 재산을 확대하였다.


일본인 학자들은 대규모 부계 혈족집단과 공유 재산에 착안하여 식민지 조선의 가족과 친족을 고대 이래 유지되어 온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그들은 조선 사회의 발전 단계는 일본이나 서구에 비해 천 년 정도 낙오된 상태로서 봉건사회 이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다. 사회진화론에서는 후진 사회일수록 개인과 가족이 미분화되어 혈족집단이 생산과 소유의 단위가 된다고 보았다. 이에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의 촌락이 씨족적인 사회통제의 기반 위에서 보존되어 왔고, 대혈연집단이 있을 뿐 소혈연집단 단위로의 분리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고 조선을 장기간 정체된 사회로 규정하였다.


정체성론에 대한 비판은 해방 이후 본격화되었는데, 비판의 주된 근거는 분지화(分枝化)였다. 조선 후기의 가족과 친족은 고대의 부계집단이 계기적으로 발달한 것으로 설정되었다. 고대 씨족은 구성원의 원리가 평등한 유별적 조직체임에 반해, 조선의 친족집단은 혈연관계의 원근과 항렬의 고하에 따라 권리와 의무에 차등이 있는 조직임이 강조되었다. 부계집단은 7세대 공동체에서 5세대 공동체로 축소되었으며, 고려 성종의 오복제(五服制) 도입은 7세대 공동체의 소멸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통일신라와 고려 초 다양한 성씨의 출현도 친족공동체의 분화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체성론에 대한 비판은 모계에서 부계로의 발전 단계를 설정한 사회진화론의 틀 안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과 토대를 공유하였다.


한편, 개별 사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부계 원리와 배치되는 현상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고대 모계제의 잔재나 유제로 설명되었다. 한국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모계에서 부계로의 전환이라는 일반 원리를 벗어나지 않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부계 원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계속 확인되었다. 관습 조사에서는 문중, 동족촌, 장자상속 등의 연원이 오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문헌조사에서는 자녀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한 조선 전기의 관행을 확인하였다. 고려에서 인족(姻族)이나 모족(母族)을 부계혈족과 동등하게 존중하였음이 지적되었고, 이성(異姓) 인물을 양자로 입양하고 외손을 후사로 삼는 관행이 고려 말까지 유행하였음도 확인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개별 현상에 근거하여 한국의 가족・친족제를 사회진화론에서 설정한 유형과 다르게 판단하는 연구가 본격화하였다. 고려 시기의 상속 관련 기록은 자녀간 균분 상속을 전제하고 있고, 분할이 불가능한 직역이나 음서(蔭敍)도 부계와 비부계를 포괄하였다. 조선 전기의 분재(分財) 문서는 엄격한 균분상속 관행을 반영하며, 조선 후기의 유서와 분재 문서는 적장자에게 유리한 상속 관행의 내용과 이유를 담고 있다.


혼인제에서는 고려에서 조선 전기까지 남편이 처의 집으로 이동하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 유행하였다. 고려 시기의 부부는 일방이 타방에 귀속되지 않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남녀 모두 이혼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가족의 규모도 5인 이내의 소가족이 보편적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자녀와 내외손이 제사를 번갈거나 분할하여 지내다가, 조선 후기에 적장자 단독봉사로 전환하였다. 지금도 통용되는, 부계와 비부계를 구분하는 친족 지칭은 16세기 이후의 산물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이모와 고모, 숙부와 외숙부를 각기 ‘아자미[叔母]’와 ‘아자비[叔父]’로 통칭하였다.


개별 현상의 실증에 집중한 연구는 마침내 고려는 물론 조선 전기까지도 부계사회가 아니라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조선 전기의 가족과 친족의 조직 원리와 형태로는 ‘Bilateral Kindred’를 번역한 ‘양측적 친속’이제시되었다. ‘양측적 친속’은 서구 인류학에서 뒤늦게 출현한 개념으로, 동남아시아의 가족・친족을 분석하여 도출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고려와 조선 전기의 친족은 부계나 모계 등 특정한 출계율(出系律)이 작용하지 않는 가운데 개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혈연이 그물망처럼 연결되는 구조를 띤다. 따라서 가족의 구성도 부계나 모계 등 특정 원리가 선험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1970년대 이후의 연구로 인하여 고려와 조선 전기의 가족・친족의 구성과 보편 관행은 부계 원리와 부합하지 않음이 분명해졌고, 강력한 부계 원리를 반영하는 조선 후기의 제반 관행은 조선 후기의 산물임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을 양반층의 재산 규모가 줄어들면서 가문의 규모와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장자를 우대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15세기부터 조선의 지배층이 기존 관행을 부정하고 부계질서를 강화하려고 노력한 것이 확인된다. 이들은 성리학에서 표방하는 가족・친족 질서를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변동은 성리학자들의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동기론(同氣論)’에 의거하여 설명하였다. 생명의 근원인 ‘기(氣)’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므로, 부계 혈연은 다른 혈연계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본원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설명하였다. 동기론에 의거하여 조직된 가족・친족 관계는 종법(宗法)으로 정형화되었다. 종법의 핵심은 가족과 친족을 부계 위주로 조직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처가 남편의 집으로 가야 했고, 남자는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양자는 동기(同氣), 즉 성씨가 같은 경우에만 자격이 인정되었고, 제사는 남자가 부계 조상에게 지내는 의례로 설정되었다. 친족의 범위와 등급을 규정한 ‘오복제(五服制)’는 비부계에 대한 부계의 절대적인 우위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종법에 부합하는 각종 예절을 세밀하게 규정함으로써 가족・친족과 관련된 일상의 삶을 부계질서에 맞게 규율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가족・친족 질서를 『주자가례』에 부합하게 재편하려 하였고, 16세기의 성리학자들은 동기론을 수용하고 기존의 관행을 비판하였다. 17세기를 전후하여 확인되는 가족・친족제의 급변은 조선 초기부터 준비해 온 의식적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가족・친족제에 사회진화론에서 설정한 발전 단계를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또한 강력한 부계 원리에 기반한 조선 후기의 가족・친족제는 성리학자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여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가족・친족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통일신라 이전의 실상은 사료의 부족으로 알기 어렵지만, 조상을 기준으로 조직된 혈연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옥저(東沃沮)에서는 큰 목곽에 온 집안의 구성원을 장사지냈는데, 이러한 풍습은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폐쇄된 혈연집단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신라의 토착 성씨는 조상을 기준으로 하는 집단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김(金)씨, 박(朴)씨, 신김(新金)씨 등은 각기 김알지, 박혁거세, 김수로 왕이라는 시조 전승이 있을 뿐더러, 특정 시기에 다수가 함께 성씨를 칭하였다. 특히 항복한 금관가야의 왕족을 신라에서 왕족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에서 ‘신김(新金)’을 칭하여 신라 왕실의 김씨와 구별한 것은 동일 시조의 후손으로서 동질감을 공유하는 집단의식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나 백제에도 이와 같은 친족집단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시기 가족・친족제의 구성 원리와 보편 관행은 부계는 물론 조상을 기준으로 조직된 집단도 상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나말 여초의 변동기를 거치면서 기존 혈연집단이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개인을 기준으로 한 혈연관계가 가족과 친족을 구성하는 단일한 원리가 되어 고려의 보편적 관행과 제도가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상을 기준으로 한 원리가 소멸하고 개인을 기준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혈연의식이 작용하자 모측과 부측,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이 동등한 비중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기반하여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 명복을 비는 불교행사는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이 공동으로 치렀다. 결혼도 일방이 타방에 귀속되는 형태가 아니라, 부부가 자신의 친족관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 결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남녀 모두 혈연에 대한 귀속감과 그에 근거한 권리와 의무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는 남편이 처의 집으로 장가드는 서류부가혼을 유행하게 하였다. 집안 살림을 담당한 여성은 혼인 후에도 친가에 소속되었으므로 시부모에 대한 의무보다 친부모에 대한 의무를 강하게 느꼈다. 이러한 혈연의식과 가족구성은 부부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었다. 부부는 각자의 재산을 소유하고 처분하였으며, 남녀 모두 이혼이나 재혼이 자유로웠다. 고려시기의 관행은 대부분 조선 전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을 표방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가족・친족 질서를 부계 위주로 재편하고자 노력하였고, 여성의 행위부터 제한하였다. 태종은 삼가금지법(三嫁禁止法)을 제정하고, 성종은 과부재가금지법(寡婦再嫁禁止法)을 제정하여 처를 남편에게 종속시켰다. 세종은 남자가 장가가는 관행을 비판하고, 왕실에서는 처를 데려오는 친영제를 시행하게 하였으며, 양반들에게 사당을 지어 부계친을 제사하도록 강제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재산 상속에서 적장자에게 1/5을 더 주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부의 정책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여 16세기까지 균분상속, 처가거주가 보편 관행으로 유지되었고, 『주자가례』에 규정된 제사의 형식과 절차만 준수할 뿐, 윤회봉사(輪廻奉祀)와 분할봉사(輪回奉祀)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양반층에서 동기론에 대한 이해를 심화함에 따라 가족・친족 질서가 종법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흐트러진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가족・친족 질서로의 재편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재산 상속에서 딸의 몫이 줄다가 마침내 완전히 배제되었다. 17세기에 남자들은 장가를 들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처와 자녀를 거느리고 친가로 돌아왔으며, 처가에 체류하는 기간은 점차 짧아져 마침내 3일간 머무르는 것이 보편 관행이 되었다. 이에 따라 부계 남성이 같은 마을에 모여 살고 같은 산에 무덤을 쓰게 되었다. 또한 윤회봉사와 분할봉사가 소멸하였고, 적장자가 제사를 독점하였다. 전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부계 혈연집단이 성립하여 동일 시조의 후손이라는 동질감과 권리 의무를 공유하였다.


한국의 가족・친족제는 조선 후기의 관행과 서구 사회진화론의 영향으로 인하여 고대사회 이래 부계제가 지속되어 온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전기에는 부계와 배치되는 관행이 보편적이었으며, 가족과 친족은 조상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개인을 기준으로 조직되었다. 조선 후기의 강력한 부계질서는 성리학에 부합하는 가족 친족제를 확립하려는 조선 지배층의 노력으로 17세기 이후 성립하였다. 이렇게 성립한 가족・친족제는 현재 ‘전통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급속히 해체되는 과도기에 있다.


[참고 문헌]

김두헌,「조선가족제도연구」(을유문화사, 1949).

김두헌,「한국가족제도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69).

노명호,「고려의 오복친과 친족관계 법제」,『한국사연구」33(1981).

노명호,「나말여초 친족조직의 변동」,『우인김용덕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1988).

문숙자,『조선시대 재산상속과 가족」(경인문화사, 2004).

이종서,「고려・조선의 친족용어와 혈연의식-친족관계의 정형과 변동」,『역사문화연구총서」8 (신구문화사, 2009).

최재석,『한국가족제도사연구」(일지사 1983)


출처 : 『역사용어사전(Dictionary of Historical
Terms
,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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