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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Wahrheit , das Wahre )

Ⅰ. 헤겔은 철학적 진리를 역사적 · 수학적 진리와 구별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물음은 일정한 탐구에 기초하여 명확한 대답을 얻을 수 있지만, 개별적인 존재 내지 내용에 우연성과 자의성, 필연적이지 않은 규정들의 측면으로부터 관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또한 수학이 학인 까닭은 엄밀한 증명에 있지만, 증명 작업은 작도의 자의성에서 인정되듯이 사항 그 자체에는 속하지 않으며, 결과가 얻어지면 폐기되는 외적인 활동에 그친다. 뿐만 아니라 수학이 소재로 하는 시간과 공간은 양이라는 몰개념적이고 비본질적인 구별과 같음이라는 추상적이고 생명 없는 통일을 원리로서 취급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공간은 움직임이 없는 죽은 것이며, 시간 역시 무관심하고 외적이며 생기 없는 내용이다. 이에 반해 철학이 고찰해야만 하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활동을 지니고 자기 속에서 살아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것이 스스로의 계기를 산출하며, 그것을 더듬어가는 내적 필연성을 주시하여 언표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대상의 생명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내재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정신현상학』 3. 52].

Ⅱ. 철학에서 주어지는 진리(Wahrheit)의 정의는 개념과 실재의 일치(die Übereinstimmung des Begriffs und derRealität)이다. 다만 그것은 사유 내지 인식과 존재의 일치로서의 올바름(Richtigkeit)이나 형식적 진리(dieformelle Wahrheit)와 같지 않다. 개념을 주관적인 것으로 보고, 실재를 객관적인 것으로 삼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개념이 보편적인 것으로 되고 실재가 개별적인 것으로 되어 후자가 전자에 합치하는 것이 진리로 간주되는 것이다[『논리의 학』 6. 311].

그러므로 보편은 개별적인 것들의 비교와 추상에 의해서 얻어진 경험적 보편이 아니라 개별에 선행하고 개별의 존립근거로서 개별 속에서 구체화하여 현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개별적인 것 역시 추상적인 개별이 아니라 보편성으로 고양된 것으로서 있게 된다. 따라서 양자가 일치한다는 것은 보편이 개별적인 것 속에서 현현하고 개별적인 것이 보편을 구현하고 있는 구체적 보편 내지 진무한의 성립을 의미한다. 일치하는가 아닌가라는 의미에서 진위가 물어질 때에는 개별이 그 기준인 개념에 상응하는가 아닌가, 그 개념의 완전한 표현인가 아닌가가 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음미에 기초하여 개념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노력도 생겨난다. 거짓된 것은 단지 폐기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을 촉구하는 적극적인 계기로 간주된다.

『정신현상학』에서의 의식의 경험이 세 개의 명제, 즉 "의식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의 개념이다", "의식은 그것 자신에서 자기의 척도를 부여한다", "의식은 자기 자신을 음미한다"에 의해서 설명될 때 의식은 자기가 체현해야만 하는 개념을 자각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척도 내지 기준으로 하여 자기음미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음미란 자기의 개념과 자기와의 비교에 다름 아니다[『정신현상학』 3. 74-77].

Ⅲ.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판단에서 진리의 표현을 구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판단은 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포함하며, 계사에 의해서 그것을 결합하면서도 전제되어 있는 불일치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판단의 주어-술어 구조가 사물의 실체-속성 구조에 상응될 경우에 속성의 매거함에 의해서 실체의 완전한 포착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의문스러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판단은 진리의 표현형식으로서는 불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이 장미는 빨갛다"고 말할 때 "이 장미는 빨갛지 않다"라는 부정이 이어져야만 한다. 좀더 적절한 표현형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관의 근본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것으로 된다[『엔치클로페디(제3판) 논리학』 28절].

Ⅳ. 진리의 표현 문제를 둘러싸고 헤겔은 "참된 것을 실체(Substanz)로서가 아니라 주체(Subjekt)로서도 파악하여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실체성이란 존재 내지 지의 직접성(무매개성)을 의미하며, 거기서 진리(DasWahre)는 운동을 포함하지 않는 정지태로서 파악되게 된다. 이에 반해 주체란 살아서 운동하는 실체이며, "타자존재에서 자기로 반성하는 운동"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절대적인 타자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안다"[『정신현상학』 3. 29]. 다시 말하면 주체로서의 참된 것은 자기를 타자존재로 가져와 외화하면서 자기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외화하고 전개하여 다양으로 된 것을 자기 속에서 다시 파악하는 내화의 활동으로서 있는 것이다. 정신과 절대자라고도 불리는 참된 것의 이러한 존재방식은 기독교의 신 관념에 부합한다.

물론 이와 같은 주체적 진리관의 확립에 있어 실체를 저버려서는 안 되며, 속성의 기저에 놓인 부동의 실체의 내적 모순을 명확히 하는 형태로 실체를 주체로 지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판단형식의 지양을 통해 진리의 표현형식을 추구하는 것과 병행된다.

Ⅴ. 판단의 주어에 대응하는 실체는 속성들의 담지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들을 제거하여 실체 그 자체를 주시하고자 한다면, 그것 자체는 아무런 규정도 없이 공허한 것으로서 사념될 수밖에 없다. 주어의 위치에 놓일 때 그것은 다만 판단의 출발점이라는 의미만을 지니며, 그 규정은 술어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판단자는 주어로부터 술어로 이행하며, 그로부터 주어로 귀환하는 반사운동을 수행하게 된다. 판단에서 비중은 오히려 술어 측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반성의 운동을 포함한다는 것을 예측케 한다.

그렇지만 술어를 실체의 우유성으로 간주하는 한 실체는 하나의 술어에 의해서 완전히 규정되지 않으며, 판단자는 실체의 충실을 지향하여 하나의 술어로부터 다른 술어로 이행할 수밖에 없고, 또한 쉽게 이행할 수 있다. 실체에 대해서 사유는 외재적이며, 외적 반성으로서 자유로운 방황을 수행하는 것이다. 헤겔은 그것을 이치추론적 사유(das räsonnierende Denken)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방황은 실체와의 일치를 달성할 수 없는 한에서 오류 가운데를 헤매는(herumirren)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변적 명제(der spekulative Satz)에 의해서 저지된다. "절대자는 존재이다"와 같은 명제에서 술어는 주어의 전체를 흡수하고 주어는 술어로 융해되는 것이며, 판단자는 술어를 떠나 다른 규정으로 이행할 수 없고 술어에 머물러 그것을 숙고한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거기서 파악된 내용과 더불어 주어로 귀환할 때 명제의 이해가 성립된다.

그러나 하나의 규정(존재)을 숙고하게 되면, 그것이 반대규정(무)과의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주어로의 귀환은 이러한 대립을 수반한 귀환이다. 그때 주어는 서로 대립하는 규정들을 포함하는 종합자이며, 분석적으로 드러내면 이율배반을 낳는다("절대자는 존재이다", "절대자는 무이다")[『엔치클로페디(제3판) 논리학』 86, 87절]. 이율배반을 진리의 최고의 형식적 표현이라고 한 『차이 논문』의 주장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대립의 종합은 일정한 관계를 나타내며, 이 관계 그 자체의 규정을 파악할 것이 요구된다. 더욱이 모든 규정은 부정이기 때문에 관계의 규정 자체가 대립하는 규정과의 상호관계에서가 아니라면 파악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새로운 종합이 요구되며 발전을 낳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합의 계열이 전체에 도달했을 때 진리는 현실적으로 된다. "진리는 전체이다". 모든 규정은 이 계열 속에 위치지어져 결합(추론Zusammenschließen)되어 있고, 고립된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전체는 "취하지 않은 것 없는 바쿠스제의 명정"에 비유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전체로서 "투명하고 단순한 정지"에 다름 아니다[『정신현상학』 3. 46].

이와 같은 전체의 관점에 설 때 참된 것은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자기의 규정성, 한계를 자기 자신 속에 지니며, 유한한 것과 같이 그 규정을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여 타자에 의해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실체에 대한 생동하는 파악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사변(Spekulation)의 목표이자 성과이다.

Ⅵ. 이상과 같이 주체로서의 진리의 성립을 표현형식에 따라 고찰하게 되면, 그 근저에 진리에 다가가 파악하고자 하는 주관의 활동이 있고 그 제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한한 사유형식에 구속되면서도 이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 운동으로서의 진리관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의 주체주의는 근대적 주관주의와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으며, 거기서 성립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만 한다. 반성(Reflexion)의 기능이 헤겔의 진리관과 방법사상을 논하는 데서 중시되는 것이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야마구치 마사히로()

[네이버 지식백과] 진리 [眞理, Wahrheit, das Wahre] (헤겔사전, 2009. 1. 8., 가토 히사다케, 구보 요이치, 고즈 구니오, 다카야마 마모루, 다키구치 기요에이, 야마구치 세이이치,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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