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성] (Unmittelbarkeit)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중간의 매개물(Mittel)을 개입시키지 않은(un) 채로'라는 의미로 '사태가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 마음에 포착될 수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사이를 두지 않는 채로'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순간적인 즉각적 이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으로는 야코비가 개념의 매개를 배제한 '직접지'를 중시하고 슐라이어마허가 '절대의존의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간주한 데 대해 개념을 중시하는 칸트와 헤겔 등이 대립했다. 그러나 칸트와 헤겔이 직관의 중요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헤겔의 경우 직접성이 성립하는 경우는 둘이 있다. ① 인식의 시원의 경우에는 "진리는 직접성을 부정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논리의 학』 6. 571]라고 말해진다. 직관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실 결과적으로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절대적인 것이다'라고 일면적으로 주장하는 셈이다. "절대적인 것은 인식의 매개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같은 곳]. ② 인식의 결과의 경우에는 "반성이 직접적인 것을 눈앞에서 발견한다"[같은 책 6. 27]고 말해진다. 마치 바둑의 명인이 숙고를 거듭하여 반면을 바라볼 때 일순간 오십 수순이 보이는 것처럼 반성의 결과가 직접성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면 본질이 있는 그대로 보이게 된다.
그 구조는 "본질은 자기 자신을 미리 정립한다. 이 전제의 지양이야말로 바로 본질 그 자체인 것이다"[같은 곳]라고 말해진다. 플라톤적으로 말하면, 본질을 앞선 세계에서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있지만, 그 전제를 지양하여 갑자기 눈앞에 말의 영혼으로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본질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직접성을 비판한 것은 직접지에는 본래 매개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코비가 직접적으로 절대적인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헤겔은 감각 · 지각의 차원만으로 직접성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최고의 차원에서도 직접성이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진리의 인식에서 직관적인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가토 히사타케(加藤尙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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