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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헤겔주의[독일]] ()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관념론 철학, 그리고 헤겔 철학 부흥의 움직임이 보이며, 이 운동이 신헤겔주의라고 총칭되지만, 그러나 다른 나라들과 독일에서는 약간 경향을 달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들에서 헤겔 철학은 우선은 외래의 사상으로서 어느 정도 통합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향사는 이 철학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태도로 비교적 안정된 형태로 진행된 데 비해, 독일에서는 1840년대에 시작되는 절대적 관념론의 해체과정을 통해 헤겔 철학의 영향사가 심각한 단절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촉진한 것으로서는 첫째로 헤겔 좌파로 대표되는, 3월 혁명을 앞에 두고 철학의 실천화, 현실화를 추구하는 입장으로부터의 비판, 둘째로 자연과학의 진보와 이것에 수반되는 산업사회의 발전을 배경으로 실증주의, 유물론, 실용주의 등이 대두했던 것, 셋째로 역사주의의 상대주의가 관념론의 기반을 허물었던 것 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860년대에 들어서서 이러한 추세에 반해 18세기에 칸트가 뉴턴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근대과학에 대해서 등장했던 것처럼 인식론적이고 방법론적인 검토를 덧붙임으로써 그것의 객관성과 정밀성에 만족하는 과학을 독단의 선잠에서 각성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랑게(Friedrich Albert Lange 1828-75), 코헨(Hermann Cohen 1842-1918), 리프만(Otto Liebmann 1840-1912), 릴(Alois Riehl 1844-1924), 그리고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1848-1915)와 같은 사람들에 의한 이른바 신칸트주의 운동이다. 그리고 칸트에서 시작되는 예전의 독일 관념론 운동이 곧이어 헤겔을 불러냈던 것처럼, 이 신칸트주의 운동은 곧이어 헤겔 철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하르트만(Karl Robert Eduard von Hartmann 1842-1906)은 1877년에 『현대의 철학적 과제에 대한 신칸트주의, 쇼펜하우어주의, 헤겔주의의 입장』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동향을 예고하고 있지만, 헤겔 철학 부흥에 직접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은 헤겔 학도의 철학사가인 피셔(Kuno Fischer 1824-1907)의 『헤겔의 생애와 저작과 학설』(1897)의 간행에 즈음하여 딜타이가 1900년에 서평하고 거기서 헤겔 철학의 발전사적 연구의 필요를 호소한 것이다. 딜타이 자신이 이 과제를 받아들여 『청년 헤겔』(1905)을 저술하며, 이어서 그가 시사한 것에 기초하여 그의 제자 놀(Herman Nohl 1879-1960)이 당시 베를린 왕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헤겔의 유고에서 초기 초고를 『헤겔의 청년기 신학논집』(1907)으로서 간행함으로써 그 후의 청년 헤겔 연구에 결정적인 공헌을 수행했던 것이다.

스스로 신칸트주의 운동에 편승한 빈델반트는 1910년, 그의 하이델베르크 총장 취임연설을 『헤겔주의의 부흥』이라는 제목으로 행하는데, 이것은 이렇듯 헤겔 철학을 바로보고자 하는 기운을 분명히 철학 운동 속으로 도입하여 자리 잡게 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헤겔 사후 100년에 해당하는 1930년대 초까지 계속되어 나치 대두와 더불어 변질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독일의 신헤겔주의의 특색은 결정적으로 신칸트주의 운동과 딜타이의 생철학에 의해 열린 지평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신헤겔주의 운동은 전반적으로 헤겔 철학에 있어 절대정신의 형이상학의 재생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관심은 칸트와 신칸트주의 운동이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기초짓기로 향하는 것을 이어받아 역사적 세계의 총체적 파악에로 향한 헤겔의 사색을 뒤따라 시도함으로써 정신과학의 방법과 이것을 기초짓는 논리를 획득하는 데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신헤겔주의의 헤겔 해석은 『논리의 학』, 『엔치클로페디』보다는 오히려 『정신현상학』과 '객관적 정신의 학'으로 향했으며, 헤겔의 변증법 논리도 이러한 헤겔의 역사적 생의 이해와 결부되어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헤겔주의 운동에서는 헤겔 철학을 전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시킨다든지 다시 구축한다든지 하는 단서가 생겨나지 못했다. 신칸트주의가 마르부르크와 하이델베르크를 거점으로 학파를 형성했던 것에 대비하여 신헤겔주의 운동은 어떠한 학파도 형성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위와 같은 사정과 관계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신헤겔주의의 특색으로서 이 철학운동이 지닌 헤겔 저작의 새로운 간행이라는 문헌학적 운동과의 깊은 결합에 관해 언급해야만 한다.

딜타이가 제창하고 아카데미에 의한 칸트 전집 간행에도 자극을 받아 놀을 뒤이어 헤겔의 미간행 초고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헤겔 저작 간행 운동이 추진되었으며, 그 성과는 라손(Georg Lasson 1862-1932)에 의한 철학총서판의 헤겔 전집의 간행, 글로크너(Hermann Glockner 1896-1979)에 의한 구 헤겔 전집의 개정복각, 호프마이스터(J. Hoffmeister)에 의한 『헤겔 발전의 기록』(1936) 등에서 보는 대로이다. 나아가 헤겔 부흥의 물결은 독일에서 유럽으로 널리 전파되었지만, 이 기운을 받아들여 1930년대에 헤겔국제연맹(Internationaler Hegel-Bund)이 결성된 것도 빠뜨릴 수 없다. 여기에 독일에서도 글로크너, 해링(Theodor Haering 1884-1964), 라손 등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가 참가했지만, 그들은 모두 독일에서의 신헤겔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고즈마 타다시()

[네이버 지식백과] 신헤겔주의 [新-主義] - [독일] (헤겔사전, 2009. 1. 8., 가토 히사다케, 구보 요이치, 고즈 구니오, 다카야마 마모루, 다키구치 기요에이, 야마구치 세이이치,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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