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
Ⅰ.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 5. 5-83. 3. 14]. 마르크스가 헤겔 철학을 연구하게 된 것은 B. 바우어를 중심으로 하는 학외 그룹에서의 교제를 계기로 해서이다. 1837년 11월 10일자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헤겔 철학의 단편을 읽었지만, 그 그로테스크한 바윗덩어리 같은 선율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라고 쓴 마르크스였지만, 37년 여름에 질병 요양을 위해 방문한 슈트라로우에서 헤겔학파의 모임인 '독토르 클럽'에 가입하고, 거기서 헤겔 철학에 친숙하게 되어 우선 그 법철학과 정신현상학을 연구.
39년부터는 바우어의 강한 영향 아래 학위논문의 집필에 전념하였으며, 41년 4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예나 대학에 제출하여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서문 초안에 "이제야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회의주의학파의 체계를 이해할 때가 왔다. 그것은 자기의식의 철학이다"[디츠 판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MEW.) 보권 (EG.) 1. 309]라고 하고 있듯이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은 바우어적인 색채를 띤 자기의식론이었다.
이 논문의 의의에 관하여 히로마쓰 와타루(廣松渉)는 마르크스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대립을 지양한 입장, 요컨대 '추상적 · 개별적인 자기의식을 원리로 하는' 에피쿠로스의 입장과 '추상적 · 보편적인 자기의식을 원리'로 하는 스토아학파의 입장을 지양한 '구체적인 개별성 · 보편성'에서의 자기의식의 입장"[『マルクスの思想圈』 245쪽]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후 마르크스는 40년 2월에 간행된 헤겔의 『종교철학』 제2판의 서평을 계획하거나, 41년 11월 간행된 바우어의 『무신론자이자 반그리스도인 헤겔을 심판하는 최후의 심판 나팔』의 제2부 『신앙의 입장에서 판정한 헤겔의 종교론과 예술론』을 바우어와 공저로 내놓고자 했으며, 나아가 헤겔의 법철학이 프로이센 국가의 승인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루게(Arnold Ruge 1802-80)의 영향을 받아 헤겔의 자연법, 특히 그의 입헌군주제의 비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인신문』 편집자가 된 마르크스는 시사 논문의 집필에 전념한다. 이것은 언뜻 보아 헤겔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대단히 헤겔적 색채가 짙은 것이었다.
예를 들면 42년 5월 5일자 『제6회 라인주 의회의 회의』에서 마르크스는 "법전은 한 국민의 자유의 바이블"이며 "법률은 자유라는 무의식적인 자연법칙이 의식적인 국법으로 될 때에만 참된 법률이다"[MEW 1. 58]라고 헤겔을 떠올리게 만드는 필치로 쓰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는 헤겔과는 달리 의회는 "개인이 아니라 신분이 논전하는"[MEW 1. 34] 마당이며, "특수적 이해의 대표기관"[MEW 1. 147]에 불과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그 후 43년 3월에 나온 『일화집』에서 포이어바흐의 '철학 개혁을 위한 잠정적 과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은 마르크스는 『헤겔 국법론(261절-313절) 비판』을 정리한다. 그는 "실제로 헤겔은 '정치체제'를 '유기체'라는 보편적 추상 이념으로 해소시키는 데 불과했다. 그는 이념의 주어인 것을 그 소산, 술어로 만들어버렸다"[MEW 1. 213]고 하며 포이어바흐가 했던 것처럼 헤겔에서의 주어와 술어의 전도를 고발한다. 또한 헤겔의 군주제에 대치하여 인간주의 입장에서 민주제를 제창하고, 또 헤겔이 보편적 존재로 삼은 관료에 대해 관료제는 상상 속의 국가이며 국가의 정신주의라고 하여[MEW 1. 249] 그것의 신분적 피제약성(계급성)을 지적한다.
그는 "헤겔의 주된 오류는 그가 현상의 모순을 본질에서의, 즉 이념에서의 통일로서 파악하는 데 있다. 그러나 현상의 모순은 좀더 깊은 것, 본질적인 모순을 그 본질에 지니고 있다"[MEW 1. 295f.]고 비판하면서 자기의 과제를 "헤겔이 생각하기에 이르는 곳에서 논리적 개념의 규정들을 재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대상의 독자적인 논리를 파악하는 것"[MEW 1. 296]이라고 하여 소외된 노동의 실태 해명에 착수한다.
43년에 쓴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에서 그는 시민사회와 국가의 분열에 초점을 맞춘다. "정치적 국가가 참으로 성숙하게 된 곳에서 인간은 단지 사상과 의식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생활 속에서 천상과 지상의 이중생활을 영위한다. 천상의 생활이란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생활이며,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공동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지상의 생활이란 시민사회에서의 생활이며, 그 속에서 인간은 사인으로서 활동하고 다른 인간을 수단으로 간주하며, 자기 자신도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소원한 힘들의 유희 도구로 된다"[MEW 1. 354f.].
인간은 정치적 공동체의 성원으로서의 공민이라는 입장에서 추상적인 천상생활을 영위하는 한편, 시민사회의 성원으로서의 사인이라는 입장에서 현실의 지상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인간의 유적 존재는 국가 속에서 추상화되고, 현실의 인간은 원자적으로 고립되어 '모나드로서의 자유'를 지닐 뿐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정치적인 혁명이 아니라 시민사회 그 자체의 변혁이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는 이러한 시민사회 변혁의 담당자를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과제이며, 마르크스는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찾았다.
44년 파리에서 쓴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는 헤겔 국법론 비판에서 해명한 문제를 과제별로 다시 정리하여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헤겔의 『현상학』과 그 최종적인 성과-즉 운동하고 산출하는 원리로서의 부정성의 변증법-에서 위대한 것은 특히 헤겔이 인간의 자기산출을 하나의 과정으로서 파악하고 대상화를 탈대상화로서, 외화로서 그리고 이 외화의 지양으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런 까닭에 그가 노동의 본질을 파악하여 대상적인 인간을, 즉 현실적인 까닭에 참다운 인간을 인간 자신의 노동의 성과로서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MEW. EG 1. 574]라고 칭찬하는 한편, "그는 노동의 긍정적인 측면을 볼 뿐으로 그 부정적인 측면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헤겔이 그것만을 알고 승인하는 노동은 추상적으로 정신적인 노동이다"라고 비판한다.
45년 2월의 『신성가족』에서는 헤겔의 "사변적 구성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 "헤겔은 자기의식을 인간의 자기의식으로, 즉 현실적인, 따라서 또한 현실적 · 대상적 세계에 자리 잡고 이것에 제약되는 인간의 자기의식으로 삼는 대신, 인간을 자기의식의 인간으로 삼는다. 그는 세계를 머리로 서게 만들고, 그러므로 머릿속에서 모든 제한을 해소시킬 수 있다"[MEW 2. 204]고 비판한다.
후기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는 『자본』 제2판의 후기에 있는 말로 상징된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 근본에서 헤겔의 방법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사유과정이 현실적인 것의 조물주이며 현실적인 것은 사유과정의 외적 현상에 불과하다. 나아가 그는 사유과정을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독립적인 주체로 전화시킨다. 나의 경우에는 거꾸로 이념적인 것은 인간의 두뇌로 전이되어 번역된 물질적인 것에 다름 아니다". 스스로 "저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고백"하는 마르크스는 "변증법은 헤겔에 의해서 신비화되긴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가 그 일반적 운동형태들을 우선 포괄적이고 의식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변증법은 그의 경우 머리로 서 있다. 신비의 껍데기에 싸여 있는 합리적인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뒤집어야만 한다"고 쓰고 있다.
나중에 레닌이 "마르크스는 비록 『논리학』에 관한 저서를 쓰진 않았지만 『자본』이라는 논리학을 남겼다"고 쓰고 있듯이,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는 생애에 걸쳐 대단히 밀접한 바가 있었다.
Ⅱ.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 11. 28-95. 8. 5]. "종교는 마음의 문제이다"라고 하며 슐라이어마허에 공감한 청년 엥겔스는, 1839년 11월의 그레버(Friedrich Graeber 1822-95)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바로 헤겔주의자로 될 것이네. 그렇게 될지 어떨지는 물론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슈트라우스가 내게 헤겔의 밝은 빛을 밝혀주었네. ······ 헤겔의 역사철학은 바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쓰고 있네"라고 적고 있다. 당시는 "2, 3일 전 나는 신문에서 헤겔 철학이 프로이센에서 금지되고 어느 유명한 할레 대학의 헤겔학파 강사의 강의가 대신의 포고에 의해 정지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네"와 같은 시대였다.
베를린으로 옮긴 엥겔스가 우선 몰두한 것은 헤겔의 입장에 선 셸링 비판이며, 41년 12월에는 『셸링의 헤겔론』, 42년에는 『셸링과 계시. 자유로운 철학에 대한 최근의 반동적 기도에 대한 비판』을 쓴다. 여기서 엥겔스는 "이성적인 것은 분명히 필연적이며, 필연적인 것은 현실적이어야만 하는 한 현실적으로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최근 철학의 위대한 실천적 성과로의 가교"[MEW. EG 2. 180]이지만, 셀링은 이성적=본질적=소극적, 현실적=실존적=적극적이라고 생각하고 양자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여 반동적 역할을 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엥겔스의 이러한 생각은 만년에도 변하지 않아서 86년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결』에서도 "헤겔의 경우 현존하는 것 모두가 현실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 이 국가가 이성적이고 이성에 적합한 것은 그것이 필연적인 한에서이다"[MEW 21. 266]라고 말한다.
물론 엥겔스는 무조건적으로 헤겔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헤겔의 체계가 방법에서나 내용에서 관념론적으로 거꾸로 세워진 유물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엥겔스가 전 생애에 걸쳐 일관되게 찬양한 헤겔의 장점은 그의 역사 감각이며, 특히 논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일치에 관한 것이었다. 다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일치를 상향적 종합=서술과정에서의 그것과 단절시키고 있다[MEW 13. 632]. 그러나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한정을 넘어서서 이 일치를 물질적 자연 속에서 확인하고자 하여 자연에서의 사실들의 운동과 발전의 법칙성을 입증하고자 노력했다. 이것이 『자연변증법』이라고 불리는 노트이다.
Ⅲ. 레닌[Vladimir Illich Lenin 1870. 4. 22-1924. 1. 21]. 레닌은 1914-15년경에 열심히 헤겔을 연구하고 『역사철학』과 『철학사』, 『논리학』에 관해 상세한 노트를 남긴다. 또한 잡지 『마르크스주의의 깃발 아래』의 22년 3월호에서는, 우리는 "헤겔 변증법의 유물론적 동호회"가 되어야만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레닌이 특히 힘을 기울인 일은 변증법을 인식론으로서 확립하는 것이었다.
Ⅳ.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의 헤겔-마르크스 관계는 옛날부터 플레하노프(Gregorii ValentinovichPlekhanov 1856-1918)와 베른슈타인(Eduard Berstein 1850-1932), 그리고 특히 데보린(Abram MonsevichDeborin 1881-1963)과 미틴(Mark Borisovich Mitin 1901- )의 논쟁 이래 화제로 되었지만, 루카치(LukácsGyörgy 1885-1971)에 의한 면밀한 초기 헤겔 연구 이후 일면적인 논의는 회피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는 호소미 스구루(細見英)의 분류를 소개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1. 관념론인가 유물론인가를 척도로 하여 헤겔과 마르크스의 대립, 아니 오히려 단절을 주장하는 흐름. 전형-제2 인터내셔널의 주요 이론가들, 스탈린, 미틴, 그로프 등. 2. 변증법 내지 소외론을 축으로 하여 헤겔과 마르크스의 직접적인 연속성을 주장하는 흐름. 이것은 신헤겔주의적인 또는 실존주의적인 경향을 지니는 마르크스 연구자들에 의해서 대표되는 것으로서 마르쿠제에서 하나의 전형을 볼 수 있다. 3. 헤겔과 마르크스의 대립을 매개로 한 연속성, 다시 말하면 마르크스에 의한 헤겔의 방법의 '역전'을 통한 계승, 즉 지양의 내적 구조를 해명하고자 하는 지향. 이것은 레닌의 『철학 노트』를 선구로 하여 루카치, 가케하시 아키히데(梯明秀), 귄터 힐만 등의 관점과 저작들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고 있다"[細見, 『경제학 비판과 변증법』, 10쪽] -시바타 다카유키(柴田隆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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