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학우회] (Burschenschaft)
대불 해방전쟁 후에 결성된 애국주의적인 학생 단체. 우선 1815년 6월에 예나 대학에서 결성되었으며, 1817년 10월에는 예나 대학의 발기에 의해 루터의 종교개혁 300년 기념과 라이프치히 전투의 전승기념을 겸하여 발트부르크 축제가 개최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각 대학에서 대학생 학우회가 성립되고, 그 다음 해인 18년 '전독 대학생 학우회(Allgemeine Deutsche Burschenschaft)'가 설립되었다. 독일 민족의 자유와 통일을 기치로 그 헌장에서는 전체 학생들 상호간의 통일과 자유 · 평등, 모든 권리 · 의무의 평등이 부르짖어졌다. 이의 성립에 대해서는 '체조의 아버지' 얀(Friedrich Ludwig Jahn 1778-1852)과 피히테의 이념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얀이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폴렌(Karl Follen 1778-1852)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적 그룹인 '절대파(Unbedingte)'가 대두하는 등 점차로 내부대립이 현저해지고 있었다. 이 급진파의 일원이었던 잔트(Karl Ludwig Sand 1795-1820)에 의한 코체부 살해사건(19년 3월) 등을 계기로 당국에 의해서 반동정책이 진척되어 19년 8월의 카를스바트 결의에 의해 혹독하게 탄압되기에 이르렀다.
대학생 학우회에 대한 헤겔의 관계는 예를 들면 1819년 5월의 대학생 학우회가 주최한 피헬스베르크(Pichelsberg)의 축전에 헤겔이 동료 교수들과 더불어 초대되었던 것과, 또한 19년의 탄압 때에 헤닝, 카로베, 아스베루스(Gustav Asverus 1798-1843) 등이 체포, 추방되었지만 이들 헤겔의 제자와 학생 등의 다수가 대학생 학우회에 소속되거나 적극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것 등에서 생각해보면 헤겔은 확실히 프리스를 지도자로 하는 급진적인 운동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비판하고 선을 긋고 있었지만, 대학생 학우회의 운동 그 자체에는 친밀하게 결부되어 있었으며[Ilting], 또한 대학생 학우회 내부의 직접적인 상세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 운동 자체를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D'Hondt]. -미즈노 다츠오(水野建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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