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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무 여공파업] ()

1923년 7월 3일 경성 광화문밖에 있는 해동(海東) · 뇌구(瀬口) · 경혜(京鞋) · 동양 네 군데의 고무공장에서 일하던 여직공 일백 수십 명이 일제히 파업을 하였다. 파업의 직접적 이유는 남자신 1켤레에 7전(錢), 여자신 6전, 아이들신 5전을 주던 종래 임금보다 2원 내지 3〜4원을 깎아 지불하면서 강제로 일을 시키는 데에 불만, ① 현재 임금을 먼저와 같이 할 일, ② 여공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감독을 해고할 일, 등 두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여공들의 요구에 고무공장 대표들은 ① 동맹파업한 직공은 각 공장에서 절대로 고용하지 말 것, ② 금후로도 이미 고용된 직공이 동맹 파업에 가입하는 경우 다 같이 해고할 것 등, 강경한 결의를 하여 여직공들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여공들은 굴하지 않고 5일, 새로 파업에 참가한 한성고무공장 여공까지 합하여 「경성고무 여직공조합」을 조직, 조선노동연맹회에 가입하는 한편, 아사동맹(餓死同盟)을 체결, 고무공장 앞의 내려쪼이는 불볕 아래서 연좌데모를 하며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였으나, 경찰에서는 도로취체법과 치안경찰법을 내걸고 강제로 해산시켰다. 한편 조선노동자연맹에서는 여공 대표로 하여금 공장측과 교섭케 하는 한편 경성부 내의 여러 직공 단체와 토요회 · 서울청년회 · 노동단체 등과 더불어 「경성고무 여공파업 아사동맹동정단」을 조직하여 여론을 일으키고 동정 음악회를 열고 동정금을 모으는 등 각 방면으로 그들을 원조 격려하였다. 동정금을 보낸 단체를 보면, 경성 양말직공조합 · 경성 인쇄직공친목회 · 경성 양화직공조합 작업부 등 조선노동연맹회의 소속 단체를 비롯해 토요회 · 교육협회 등 사회단체, 그리고 반도고무공장 남녀 직공 등이었으며 마산 노동동우회에선 파업여공들을 위해 동정 연설회를 개최하고 동정금을 모아 보냈다. 또한 멀리 일본 노동총동맹 관동대회의 오사까의 조선노동동맹회에서도 격려전보와 동정금을 보내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보여주었다. 이 경성고무 여공들의 투쟁과정에서 조선노동연맹회의 간부 몇 명이 검속되고 여공들이 생활상의 어려움을 받았으나 끝까지 지구전에 임한 결과 공장측은 파업 10여 일 후인 7월 19일 4개 공장 여공들의 요구를 완전히 수락하여 다시 취업하게 되었으며, 뒤에 파업에 가담했던 한성고무와 경성고무공장 직공들도 성공리에 파업을 끝냈다. 이 경성고무 여공파업은 우리나라 여성노동 사상 최초로 전국적 내지 일본에까지 광범하게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다진 노동쟁의로서 특기할 만하다.
■ 인접어

개화사상(開化思想)
거문도(巨文島) 사건
거창(居昌)양민학살사건
건국동맹(建國同盟)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경성고무 여공파업
경성고무 여공파업
경향신문 폐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공출(供出)
관동군(關東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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