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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비판] (critics of Marxism)

맑스주의에 대한 체계적이며 비판적 검토는 189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 경제학에서 맑스 자신이 직접 대답한 (1879-80)최초의 비판적 언급은 아돌프 바그너의 《일반 또는 이론적 국민경제학 강의》제1부(1879) 제2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다 실제적이며 비판적 논의는 1894년에 《자본론》제Ⅲ권이 출판된 뒤에 전개되었다. 베르너 좀바르트(W.Sombart)의 주목할 만한 긴 논문 ‘칼 맑스의 경제학체계 비판’(1894)과 뵘-바베르크의 《칼 맑스와 그 체계의 종언》(1896)이 그것이다. 맑스와 자본주의 경제이론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논리적 일관성을 갖는다. 뵘-바베르크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입장에서 맑스의 이론을 파괴하려는 사람들을 대표하였으며, 수 세대 동안 힐퍼딩과 같은 맑스주의자들은 그의 비판에 서야만 했다. 스티드만(Steedman, 1977)은 비록 날카롭기는 하지만, 그 비판이 맑스주의를 강화시키려는 시도로서 제공되는 대표적 실례이다. 그는 스라파에 의해 형성된 이론틀(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서의)을 맑스의 논리를 평가하는 데 응용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맑스 이론의 전 구조를 포기하기를 주장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주된 비판의 영역은 그것들이 전 체제의 중심이기 때문에 잘 선택된 목표들인 맑스의 가치론, 이윤의 원천, 그리고 이윤율의 저하 등이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추상적 노동과 관련된 맑스의 가치개념은 자주 노동이 상품을 교환에서 같은 크기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로 식별되는 점이 임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가치와 생산가격(그리고 잉여가치와 이윤) 사이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맑스의 주장인 것처럼 해석된 ‘변형문제’에는 보다 많은 공격이 가해졌다. 비판은 생산가격이 관측 가능한 범주인가 라는 형태를 취했으며, 경험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가치론의 유효성 여부는 그것이 가능한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르트키비츠(Bortkiewicz, 1907)는 맑스 자신의 수량해(quantitative solution)가 불완전한 것임을 보였으며, 그와 그 뒤 논자들은 (Dimitriev 1904, Seton1, 1957) 다른 해석을 제시하였다. 스티드만은 가치는 생산가격으로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우회’라는 사무엘슨의 판단(1971)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스라파의 체계(또는 보르트키비츠나 디미트리에프의 쳬계)에 서는, 가치와 가격은 각각 실물투입의 데이터로부터 직접 도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상당한 지지를 획득하였으며, 맑스주의자들로부터의 강력한 반대를 자극하였다(→Elson, 1979, Steedman et al. 1981).
맑스는 자본론에서 가치개념을 근거로 하여 이윤의 기초로서 잉여가치를 분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티드만은 그 자신의 체계에서 양의 잉여가치가 양의 이윤을 위한 필요조건은 아님을 밝히고 있다(만약 고정자본이나 결합생산이 존재한다면). 모리시마(1974)에 따르면 맑스와는 다른 개념의 잉여노동이 요구된다.
만약 잉여가치가 이윤의 원천이 아니라면 (또는 그 필요조건이 아니라면), 이윤을 설명하는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외부에 놓여져야만 한다. 뵘-바베르크는 맑스에 반대하여, 이윤은 생산수단의 생산성과 자본가의 시간 선호(time-preference)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기다림에 대한 대가인 것이다. 그 이론은 여전히 신고전파 이론의 중심에 놓여져 있다. 그리고 슘페터(1976)는 가치론을 배격하면서, 혁신(Innovation)과 기업가 정신이 있으면 항상 이윤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그는 맑스가 자본주의에서 기업가 정신의 적절한 역할을 무시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윤의 원천에 관한 이론 외에도 그 운동을 규제하는 법칙(맑스에게는 ‘가장 중요한 법칙’)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을 도출해 내는 논리에 잘못이 있다는 주장을 유발시켰다. 일반적 수준에서 많은 저자들은 맑스의 모든 가정들이 이윤율 저하에 관련된 경험적인 예측(가치 또는 생산가격으로 계산된)을 낳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어떤 저자는 맑스의 법칙이 아무런 실체도 갖지 않음을 이끌어냈다(Hodgson,1974). 자본가에 의한 신기술의 선택이 실질임금의 상승이 없는 한, 결코 이윤율 저하로 이끌어지지 않음을 입증하고자 하였던 기술진보의 효과에 대한 맑스의 제가정과는 명백히 모순되는 보다 엄밀한 비판은 오키시오(1961)에 의해서 제기되었으며, 힘멜와이트(1974)와 스티드만(1977)에 의해서 스라파주의적 이론틀 속에 위치지워졌다(→이윤율 저하).
비록 그러한 비판들이 맑스 논리의 논리적 오류와 관련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오류는 맑스의 추상 방법(Fine and Harris 1979)을 수용하지 않는 이론구조(가령 스라파의 그것과 같은)를 사용함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단 한사람의 비판자, 즉 케인즈만이 맑스, 엥겔스와 손을 끊었다. 그들에게 ‘경제적 수수께끼의 단서’를 찾으면서 그는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논쟁밖에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썼다(버나드 쇼에게 보낸 편지, 1935. 1. 1. ). 사실 맑스는 케인즈의 세이의 법칙과 화폐수량설에 대한 공격을 예측하였지만, 맑스주의의 일정한 측면에 동의하는 좌익 케인즈주의자들은 맑스 명제들의 이론적 기초를 거부한다. 예를 들면, 조안 로빈슨(Joan Robinson, 1942)은 ‘그가 가치개념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는 중요한 아이디어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것 없이는 더 선명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착취와 잉여가치에 관련된 맑스의 개념을 폐기하였다. 그렇게 하여 케인즈주의자, 신고전파 및 스라파주의적 비판자들은 모두가 맑스 가치론이 불필요하다거나 틀렸다는 논지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학에서는 현대 사회학의 두 대부라고도 할 베버(Weber)와 뒤르껭(Durkheim)이 맑스주의 사회이론에 의식적으로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사상을 상당한 정도로 정교화시켰다. 이것은 베버의 저작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그런데 베버는 맑스에 의해서 다루어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들(서구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전, 사회 제 계급과 노동운동의 중요성, 근대국가와 정치권력의 성격)을 선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물론적 역사관’에 대하여 비록 짧기는 하지만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칼 뢰비트의 견해와 같이 맑스와 베버가 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전자는 그것을 ‘소외’에 의해서 해석하고 후자는 ‘합리화’에 의해서 해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사회과학에 관한 그들 각각의 관념은 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실제적 사회 분할에 조응한다는 것이다. 베버의 사적 유물론에 대한 일반적 비판은, 그것이 특수한 가치지향에 기초를 둔 가능한 하나의 시각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해서 다른 시각들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사고(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서 행할 수 있는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이 점을 밝혀주었다. 한편 그는 결코 일면적 ‘경제적 해석’을 마찬가지로 일면적 ‘유심론적 해석’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Weber,1904). 그의 상세한 연구 (1921)에서 베버는 신분집단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계급과 계급 투쟁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 맑스주의적 견해를 희석시켰고, 맑스주의적 국가관을 비판하였으며, 특히 민족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정치권력에 관한 그의 인식에서 엘리트 이론가들의 입장에 접근하였다. 또한 그는 관료제의 성장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계급의 독재’보다는 ‘관료의 독재’를 낳기가 쉬울 것이라는 논지에서 맑스주의적 사회주의를 비판하였다(1924).
비록 뒤르껭은 베버의 경우처럼 맑스주의적 제 문제를 문제삼지는 않았지만(아마도 맑스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운동이 프랑스에서는 독일에서처럼 발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학 연보》와 기타의 맑스주의의 저작에 대한 개관 및 ‘노동의 분업의 비정상적 제 형태’(1893)에 관한 논의에서, 그리고 사회주의에 관한 강의(1928)에서 (비록 이 독일 맑스주의 사회주의는 그 체계적 검토에 이르기 전 포기되기는 하였지만) 맑스 사회이론과 대결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맑스주의이론의 특수한 장점이 사회생활을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관념에서가 아니라, 의식에 의해서 인지되지 않는 보다 심오한 제 원인에 의해’(p.648)설명하려는 것임을 인식하였다(1897).
그러나 그는 일반적으로 이것이 경제적 요인과 계급투쟁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결국 그는 계급 갈등은 유럽에서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산업사회와 노동분업에 대한 규제의 부족으로부터 발생하는 부차적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1893, 1897). 또 그는 맑스주의적 국가관에 반대하여, 전체로서 사회의 ‘지성’이며 도덕적 주체로서의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1950).
또한 이 시기에 맑스주의 내부에서 베른슈타인(1899)에 의해서 맑스 이론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었다. 그의 주된 논지 가운데 하나는, 생활수준의 상승과 중산층의 성장으로 계급의 분극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제는 맑스 이론의 재해석(예를 들어 렌너(Renner) 1953의 ‘서비스계급’에 관한 개념, 풀란차스(Poulantzas) 1975의 현재 자본주의에서 ‘소시민계급’에 관한 분석)과 그에 대한 비판(가령 파르킨 1979)은 모두에게 깊은 자국을 남겼다. 최근의 계급을 둘러싼 논쟁은 ‘새로운 노동계급’(Mallet 1975)의 개념 또는 새로운 계급구조(Touraine 1971)(→노동계급), 그리고 계급갈등과 관련지워 가장 인종적 운동(→인종)이나 여성운동(→여성해방론)과 같은 비계급적 사회운동에 관한 연구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또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성층화와 또 새로운 계급 구조의 출현 가능성에 관한 연구를 낳았다.
그 뒤 맑스주의에 가해진 중요한 사회학적 비판은 칼 만하임[Karl Mannheim]의 저작(특히 1929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발견된다. 그는 보다 일반적인 지식사회학으로써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대체하고자 시도하였다. 그의 비판과 수정은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ⅰ)그것은 ‘사고방식’과 이익, 이해(利害)에 간접적으로 관련된 일련의 태도 사이의 상관관계를 주장하며, 의식과 경제적 이익 사이의 직접적 결합을 기각한다. (ⅱ) 그것은 모든 사회적 사고는 ‘합리적’성격을 가지며 과학적 ‘진실’을 체험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맑스주의를 계급 이데올로기로서 취급한다. (ⅲ)그것은 의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계급 이외 다른 사회집단(예를들면 세대집단)을 나타낸다. 보다 최근에는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이 두 명의 중요한 사회학자로부터 나왔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은 베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관점에 의거하여, ‘경제적 해석’이 역사과학이라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정치의 경제로부터 독립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보다 일반적 연구에서 그는 샤르트르와 알튀세의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Aron, 1970). 역시 베버로부터 영향을 받은 밀즈(C.Wright Mills)는, 비록 전체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해서 덜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경제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사이의 분리라는 비슷한 견해를 취하며, 지배계급보다는 ‘파워 엘리트’라는 용어를 선호한다(그는 지배계급이 경제적-정치적 권력의 상응을 전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맑스 이론에 대한 보다 최근의 비판은 국가와 정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많은 비판자들은 ‘민주주의적 다원론’의 시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가령 Lipset, 1960) 맑스주의의 정치이론은 서구 정치체제에 대한 그릇된 모습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그 의지를 강제로 국가에 부과시키고 국가를 그 ‘도구’로 전화시킬 수 있는 ‘지배계급’이란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서구 정치체제의 특수성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정치적 또는 선거를 통한 경쟁과 더불어, 국가가 어느 특정한 계급, 또는 집단에만 이익이 되는 불공평한 어떠한 정책도 추구할 수 없도록 만든다. 다른 관점에 서 있는 비판자들 또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에 관한 인식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였다(→국가). 그리하여 맑스주의자들은 국제적 맥락에서 볼 때 다른 국가들과 경쟁하는 국가는 그 자신의 관심사를 가지며, 그것은 사회 내의 모든 계급과 집단의 이익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가령 Skocpol 1979).
맑스 이론에 대한 최근의 비평과 재평가에서 중요한 주제는, 비록 이 논의가 베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긴 하지만, ‘역사이론’으로서의 그 지위와 관련된 것이다. 하버마스(1979)는 사적 유물론에 대한 그의 ‘재구성’논의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그의 일반적 비판에 따라 (→프랑크푸르트 학파;실증주의) 사회적 발전의 초기단계는 사회적 노동과 물질적 생산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언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가족구성과 행위의 규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맑스 역사이론에 대한 보다 포괄적 비판은 반대방향에서, 포퍼와 알튀세에 의해 그 역사주의(Historicism)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 최근의 몇몇 저자들에 의해서 ‘낡은 사적 유물론’(Cohen, 1978), 즉 생산력의 성장이 결정적 영향력을 갖는다고 역설하는 입장이 큰 호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특히 하나의 사회형태로부터 다른 사회형태로의 이행과 그 안에서의 계급의 역할과 관련된, 맑스주의 이론의 보다 세부적 문제점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광범하게 받아들여지는 일반적 공식 아래서, 현대사회 조사 방법이 끝없는 홍수 속에서 밝혀내는 것과 같은, 복잡한 실제의 세세한 일들을 조화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 때문에 맑스주의자들은 그들의 도식에 맞는 증거만을 편향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예를들면, 그들의 지적 사냥터 가운데 하나였던 유럽혁명을 연구함에서 계급투쟁의 어떤 자료에 관하여 부당하게 강조한다. 계급투쟁이 정말로 역사를 관통하는가, 또는 역사에서 ‘계급’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식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자주 제기되어 왔다. 맑스주의가 이것을 강조하는 면은 마치 하일브로너(1980)가 ‘그 암묵적 목적론, 말하여지지 않은 수천의 가정들’(p.87)이라 명명한 부분으로 보여진다.
사적 유물론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생산양식’의 개념이지만, 맑스의 저작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이것이 정확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Shaw 1978, p.31). 그리고 맑스주의자들이그 불명료함에 대해서 논쟁을 할 때면, 더 더욱 경제적 토대가 어떻게 사고, 종교, 법률에 연관되어 있는가에 관해서 결코 그들 상호 사이에 합의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맑스 자신이 그러했듯이, ‘토대와 상부구조’사이의 연관에 관해 ‘느슨한 해석과 팽팽한 해석 사이에서 동요하는’경향이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Evans, 1975, p.67). 맑스주의의 이론에 광범위하게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중세 연구가는 사고와 행동의 방식은 생산체계에서 동시발생적 변화가 없더라도 매우 현저하게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샬르마뉴(Sharlemagne)의 유럽과 바바로사(Barbarossa)의 유럽은 이면에 존재하는 경제적 방법의 어떠한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차이를 갖고 있다(Leff, 1969, pp. 37-140).
특히, 과거 한 시기에서 하나의 ‘양식’또는 사회경제적 구조가 다른 것에 자리를 물려주는 과정 또는 과정들에 관하여 설득력있게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많은 맑스의 비판자들은 역사적 변화에 관한 이론은 그 근저에 기술적 변화가 있다고 간주하는 데 반해, 맑스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를 거부하여 왔다. 비록 간디(Gandy)가 말하였듯이 (1979), 맑스가 때때로 ‘부주의하게 기술결정론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p.131)는 것을 인정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충분한 보편성을 갖춘 알찬 준비와 결합된 대체적 해답을 제공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도 사고와 관념에 주어진 비중과 그들의 자율성의 정도 등은 문제가 많다. 루벨(Rubel)은 맑스의 사상에 나타나는 경제적 결정론과 창조적 휴머니즘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모순’에 관하여 말했다(1981, ed. O'Malley and Algozin, p. 51). 맑스의 후계자들은 대체로 역사에서 윤리적 요소에 관한 문제를 회피하였다(→윤리학;도덕). 그리고 이러한 모든 당혹함은 과연 오늘날 역사가 모든 곳에서 동일한, 또는 비슷한 ‘법칙들’에 따르는가 라는 문제에 의하여 심화되고 있다. 맑스주의 이론이 서구의 경험으로부터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더욱 폭넓게 인식되고 있다. 서구의 저술가들에 의한 맑스주의의 이론의 다른 지역(예를 들면 인도와 같은 국가들)에의 적용은 그 지역의 맑스주의자, 비맑스주의자 등 모든 학자들에 의해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맑스주의 사상 전체에 대한 가장 실제적이며 비판적인 검토는 의심할 바 없이 콜라코브스키의 맑스주의의 주류이다. 그것은 ‘과거 역사의 해석’으로서의 맑스주의의 가치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그 ‘환상’을 구별하고 있으며, 맑스의 지적 유산은 현대의 사회과학에 동화되어 있고-따라서 독립적인 설명체계, 또는 방법으로서의 맑스주의는 ‘죽었다’-즉, 효능있는 정치적 교리로서 그것은 단지 ‘회화적인 사이버 종교의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상가들에게 있어 다른 어떤 사유방식보다도 맑스주의에 영구적 도전을 하게되는 이유는 바로(몇몇의 미 해결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역에서 맑스주의 사상이 가지는 뚜렷한 설명능력과, 종교가 아니라 사회주의사회를 위한 합리적 규범의 체계를 생성해내는 능력인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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