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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鄧小平(1904~ )] ()

등소평은 사천성에서 출생하였고,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중국공산당 혁명군사위원회 총정치부주임을 맡고 있던 중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다. 등소평은 대장정에 참가하는 등 혁명 과정에 정열적으로 참여하였으나 당시 22세의 임표 선발대 대장의 활약에 가려 비()한족계인 등소평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1945년 중국공산당 제7차전체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9년 건국과 더불어 중앙인민 정부의 위원, 정무원 부총리(1952), 중국공산당 비서장 (1954) 등을 역임하였다. ‘당의 일원적 지배'에 의해 모택동에 다음가는 2인자'로 각광을 받았으나, 1966년 문화혁명의 시작과 더불어 당내의 자본주의 길을 걷는 제2의 실권파'라는 비판을 받고 1967년에 실각하였다. 그 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당 정치국원으로 복권되어 1980년까지 화국봉·등소평 지도체제 라 불릴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1976년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재차 회개하지 않은 주자파(走資派)'라는 혐의로 실각하였다. 또다시 1982년 복권되어 당에는 호요방 총서기, 정부에는 조자양 총리를 포석하고 4대 현대화(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의 현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는 한편 1981년 이후 줄곧 당군사위원희 주석직을 겸직하면서 당·군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그러나 19894월 호요방 사망 이후 학생을을 비롯한 인민들의 정치적 민주화 요구에 대해 유혈의 무력진압'으로 대응함으로써 그동안 쌓아왔던 개혁파의 기수'로서의 이미지를 상당히 실추시켰다. 그동안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은 1982년 헌법에서 새롭게 정식화될 만큼 인민들의 요구를 주동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었다. 세칭 등소평헌법이라 불리는 신헌법은 국가 주석직의 부활, 인치(人治)주의에서 법치주의로의 전환, 모택동의 개인숭배 배제, 모택동 사상보다 경제개발의 중요시' 등 현대화 노선에 따른 대폭적인 체제 개편을 그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적 사회주의의 구체적 실현은, 대규모의 계급투쟁이 1956년 사회주의적 개조의 완성과 함께 사실상 증식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당면문제는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켜 인민의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을 개선한다는 ()생산력론'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처럼 물질문명이 아직 발달되지 않은 초급 단계 즉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 당의 기본노선은 전면적인 개혁노선과 대외개방을 통해 생산력 발전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모택동 시대의 자력갱생과 같은 폐쇄적인 쇄국정책을 탈피하고 상품경제를 발전시킴과 동시에 선거제도의 개혁 등을 통한 민주정치의 활성화를 기한다는 방침과 결부되 어, 중외합작기업법을 통한 경제특구가 상당히 진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 개혁·개방조치가 수행 될 때 필수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적 도덕성의 문제, 이를테면 관료의 부패 현상과 문화의 타락화 현상, 인플레 현상, 부의 불균등 분배를 통한 계층적 위화감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제도적 장치(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확보)와 사상교육(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을 미루어왔기 때문에 19895월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모택동, 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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