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주의] (Adventurism)
모택동 : 홍군 내에는 아직도 모험주의 사상의 잔재가 있다. 그것은 다음의 점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1) 주체적 조건 및 객관적 조건을 생각치 않고, 무턱대고 하는 것.……모험주의의 사회적 근원은 룸펜 프롤레타리아적 사상과 소부르조아적 사상이 결합되어 있는데 있다. (당내의 잘못된 생각의 시정에 대하여, 1929, 모텍동선집 제1권, p. 142) 우리는 또한 ‘좌익’ 공론주의에도 반대한다. 그들의 생각은 객관적 과정의 일정한 발전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들 중의 어떤 자는 환상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자는 먼 장래에만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이상을 현 시기에 가지고 와서 무리하게 실현하려 한다. 그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당면한 실천에서 유리되고 당면한 현실성에서 유리된 자들인데 이것이 행동 면에서는 모험주의로 나타나는 것이 다. (실천론 1937, 모택동선집 제2권, P. 27)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 이와 같은 극좌적 분위기는 ‘8•7회의’ 이후에도 계속 성장하여, 1927년 11월에 열린 당중앙의 확대회의에 이르러 그것은 극좌적 盲勤主義(즉, 모험주의)노선을 형성함과 더불어, 당 중앙지도기관 속에서 처음으로 극좌적 노선이 지배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당시의 맹동주의자는 중국혁명의 성격이 이른바 ‘영속혁명’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혼동한 것)이고, 중국의 혁명정세가 이른바 ‘부단히 고양(高揚)’ (1927년 혁명의 실패를 불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 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질서 있는 퇴각을 조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적의 강대함과 혁명실패 후 대중의 상태를 돌보지 않고, 소수의 당원과 대중에게 전혀 승리할 가망이 없는 지방적인 봉기를 전국적으로 조직할 것을 지령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상의 모험주의와 조직상의 섹트주의적 타격정책이 발전되어 왔다.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대한 결의, 1945, 모택동선집 제3권, pp. 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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