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섭(崔長燮, 1911~?) 宋道永 朴一 朴薰 崔達浩 崔達五] ()
(太勞운동 참가자) 함남 함주 출신으로, 연명학교(連明學校)를 졸업했다. 함 흥농우회 소년부장을 지냈고 1928년 1월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 제2합성계 소속 노동자로 일했다. 1930년 11월 주영하(朱寧河)의 지도 아래 지방별 사회과학연구회 결성을 주도했다. 12월 지방별 사회과학연구회를 직장의 계별(係別) 연구회로 개편하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연구회뷰로를 주도적으로 조직한 후 제2합성계 연구회에서 활동했다. 1931년 1월 좌익노동조합결성준비회 아래 계별 연구회가 야체이까로 편입되자 제2합성반원이 되었다. 7월 ‘제1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 때 검거를 피해 쏘비에뜨 원동(遠東)직업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 6월 원동직업학교를 졸업한 후 태로 블라지보스또끄 연락부로부터 연락기관(원산-흥남간)을 설치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했다. 7월 이후 함흥의 연포(連浦) 및 흥남 여러 지역에 연락기관을 설치하고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3년 1월 홍원에서 「뉴스」를 조직원들에게 배포했다. 1935년 3월 함흥지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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