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택(崔元澤, 1895~1973) 石樵 徐相弼 金聲德 林源太郞] ()
(노농총 상무집행위원) 경북 대구 출신으로, 최춘택(崔春澤)의 형이다. 1923년 6월 꼬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 대구지역야체이까 책임자가 되었다. 그해 여름 대구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 상미회(尙微會) 활동에 참여했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3월 대구청년회 회장으로서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참가했다. 같은 달 남선노농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4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8월 사상단체 정오회(正午會)에 참여했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청총 중앙본부가 주도한 경북청년대회에 반대하여 안동에서 독자적으로 대구청년회 중심의 경북청년대회 준비회를 발족시켰다. 3월 노농총 조사부 담당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조공 만주총국 조직부장, 건국동맹 군사위 위원)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했다. 같은 달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집회금지령에 반발하여 일어난 ‘적기(赤旗)시위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했다. 11월 토오꾜오(東京)에 설치된 조공 일본부의 초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초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해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5월 만주로 파견되어 조공 만주총국 결성에 참여하고 조직부장이 되었다.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8년 12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대전역에서 “조공 만세” “조선 민족해방운동 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징역 1년을 추가받았다. 1936년 출옥했다. 1943년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이 되었으며 1944년 11월 공산주의자협의회에 가담했다. 1945년 3월 건국동맹과 함께 군사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이 되어 노농군(勞農軍) 편성과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이 무렵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남로당 감찰위원장, 노동당 중앙위원) 8 ․ 15해방과 함께 출옥했다. 재경혁명자대회에 참석하여 조공 재건을 협의하고 정치부 간부가 되었다. 1945년 9월 조공 재건을 위한 계동 열성자대회에 참석했고, 서울시인민위원회 건립에 참가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미군정이 임명한 서울시장을 비난한 선전문 때문에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1월과 벌금 1만원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에 참가하고 의장단에 선출되었고 12월 남로당 중앙감찰위원장으로 선정되었다. 1947년 8월 미군정에 의해 한때 구금되었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고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10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1955년 1월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의장, 1958년 1월 조소(朝蘇)친선협회 중앙위원,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1964년 3월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서 인도네시아, 캄푸치얀, 스리랑카를 순방했다. 1970년 11월 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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