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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웅(朴建雄, 1903~?) 朴健雄 金正友 李振善] ()

(조공재건설동맹 중앙위원, 義烈團 중앙집행위원) 평북 철산 출신으로, 1926년 3월 황포군관학교(黃補軍官學校) 보병과 제4기생으로 입학하여 10월 졸업한 뒤 중국군 장교로 근무했다. 1927년 한국유일독립당 무한(武漢)촉성회 결성에 참여하여 대표를 맡았다. 12월 광주봉기(廣州蜂起)에 참가해 분견대장으로 활약했다. 1929년 12월 북경(北京)에서 김원봉(金元鳳), 안광천(安光泉)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 겸 북경지부 책임을 맡았다. 1930년 4월 김원봉과 함께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을 맡았다. 1932년 9월 남경(南京)에서 열린 의열단 제6차 정기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0월부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사회학, 조직방법 등을 강의했다. 같은 달 의열단 대표로 각단체연합주비위원회 결성에 참가해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된 뒤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국인 항일단체인 동북의용군후원회가 제휴해 성립된 중한민중대동맹의 조직선전부장으로 활약했다. 1933년 6월 의열단의 명칭을 조선혁명무장동맹으로 고칠 것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의열단을 탈퇴했다.
(조선의용대 대원, 임정 선전위 위원) 1936년 초 상해(上海)에서 김성숙(金星淑), 장지락(張志樂) 등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다. 1937년 8월경 남경(南京)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12월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대원이 되었다. 1939년 8월 기강(淇江)에서 열린 ‘7당통일회의’에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로 참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불참하다가 1941년 12월 임정과 광복군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2년 10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약헌’ 개정 기초위원이 되었다. 1943년 4월부터 임정 선전위원회 위원, 군무부 비서, 선전부 산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민전 상임위원, 민족자주연맹 상임위원) 해방 후에도 김성숙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유지하면서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해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전개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해 한때 좌우합작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참여하고 상임위원이 되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자 서울 용산 을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혹은 월북)되었다. 1951년 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명예연구사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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