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 : 블랑키는 원래 정치적 혁명가이며, 국민의 고뇌(苦惱)에 동정하는 감정만의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에 관한 이론도 가지지 않았거니와 일정한 사회개조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이다. 정치활동에서 그는 원래 ‘행동하는 사람’, 적당한 순간에 혁명적인 기습을 시도하는, 잘 조직된 조그마한 그룹으로써 강행하는 초기 2〜3회의 성공을 통하여 일단 국민대중의 마음을 끌어당기면, 그의 지지에 의하여 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믿던 사람이다. 루이 필립 (Louis Philippe (Roi citoyen), 1773〜1850) 밑에서는 그도 물론 그의 중핵(Kern)을 다만 비밀결사로서 밖에는 조직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때도 언제나 음모에 따르게 마련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즉, 미구에 발발할 것이라는 헛된 약속으로 언제까지나 기만당해온데 싫증을 느낀 무리들이 참을 수 없게 되자 급기야 반역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다. 대저 이런 사람들에 남겨진 길이란 오직 하나, 즉 음모를 파괴해 버리든가, 아니면 아무런 외적동기도 없이 그것을 폭발시키든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되는 법이다.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1839년 5월 12일). 그리하여 그것은 곧장 압살되고 말았다. 겸하여 말한다면, 블랑키의 이 음모는 일찌기 경찰이 검거하자 못했던 유일한 것으로서 경찰의 공격은 질풍 같았다.—— 블랑키는 앞서 말한 것처럼 혁명일체를 단지 하나의 조그마한 혁명적 소수그룹의 기습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고, 따라서 폭동이 성공한 후에는 자연적으로 독재 —— 이점의 이해가 중요한 바, 모든 혁명적 계급의,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독재가 아니라 기습을 기도한, 그리고 그 자신이 이미 사전에, 그리고 한 사람 또는 2〜3명의 적은 인원의 독재하에 폭동이 조직된 것이니만큼 소수자의 독재의 필요성을 생각한 것이다. 이로써도 블랑키가 과거세대의 혁명가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블랑키주의자들은 가장 철저한, 가장 극단적인 경향을 대표하려는 점에서 바쿠닌주의자들과 일치된다. 겸하여 말하건대, 이 때문에 그들은 목표에 대해서는 바쿠닌주의자들과 아주 대립하였지만, 수단에서는 가끔 바쿠닌주의자들과 일치할 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어떤 문제에서 보다도 무신론에 관하여 급진적이었다. 무신론자라는 것은 오늘날에는 다행스럽게도 별로 신기한 것이 아니다. (블랑키파 코륜 망명자의 강령, 1874, MㆍE선집 제13권, pp.66〜70).
카우츠키 : 정권탈취의 불가결성을 주장하는 점에서는 마르크스ㆍ엥겔스와 블랑키가 일치된다. 그러나 블랑키가 모반에 의하여, 즉 한줌밖에 안되는 소수집단의 폭동에 의하여 국가권력을 탈취하는 방법이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유효한 것이라고 믿은데 반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이란 어떤 개인의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제반 정세하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고, 또 점진적으로 밖에는 조성되지 않는 제반 정세가 현존하지 않는 한 언제나 혁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다. (권력에의 길, 1920, 세계대사상전집14, 하출서방, 동경, p. 191).
레닌 : 블랑키주의는 계급투쟁을 긍정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블랑키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에 의거하지 않고 소수 인텔리겐차의 음모로써 인류가 임금노예제로부터 해방될 것을 기대한 것이다. (대회의 총결과에 붙여서, 1906, 레닌전집 제10권, P. 381).
트로츠키 : 자기가 목격했거나 참가했던 반란사건의 실패에 관한 많은 관찰과 반성으로부터 블랑키(Louis Auguste Bl- anqui, 1805〜81)는, 만일 그것을 범한다면 어떠한 반란의 승리도, 설사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극도로 곤란해지는 기술상의 많은 규칙을 도출해 냈다. 블랑키는 다음의 것을 요구하였다. 집중적인 지휘권 밑에서 시기를 놓치지 말고 정확하게 혁명적인 부대를 조직할 것, 그의 집중적 지휘권에 어울리는 적절한 장비, 충분히 계획된 바리케이드의 배치와 그의 확실한 구축, 단지 형식적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바리케이드를 방위할 것. 반란의 전투적인 임무로부터 추출된 이들 일체의 블랑키적 상칙(常則)은 물론 사회적 조건이나 군사적 기술에 따라 변화시켜야 하지만, 그러나 이것들 자체는 독일어의 Putschismus, 즉 혁명적 모험주의에 가까운 의미로서의 Blanquisme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란은 기술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다. 블랑키의 상칙은 군사적・혁명적 리얼리즘에서 나온 요구였다. 블랑키의 오류는 그의 정리에 직접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역(逆)의 정리에 있었다. 전술적인 약점이 반란을 패배시킨다는 사실로부터, 블랑키는 반란기술만 존중한다면 승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블랑키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대조시킨다는 것은 단지 이점에서만 타당하다. 음모는 반란을 대체하지 못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적극적인 소수 분자들은 그들이 제아무리 잘 조련되었다고 해도, 그 나라의 일반적인 조건여하에 관계없이 권력을 전복시킬 수 없다. 이 점에 서만 역사는 블랑키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이 점에서만 이었다. 그의 단정적인 정리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일체의 힘을 유지하고 있다. 권력을 획득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연발생적인 반란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적절한 조직을 필요로 하며, 또 계획을 필요로 한다. 또한 음모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레닌주의적 견해이다. 바리케이드 숭배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은 군사적 기술 및 기술일반의 발전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블랑키주의의 반란전술은 구(旧)파리의 성격, 즉 반(半)수공업적 프롤레타리아트, 좁은 거리와 루이필립의 군대제도와도 일치된 것이었다. 블랑키의 원칙적인 오류는 혁명을 반란과 동일시한 것이었다. 그의 기술상의 오류는 반란과 바리케이드를 동일시 한데 있다. (러시아 혁명사 제5권 상, 각천서점, 동경, pp226〜228).
로자 룩셈부르크 : 블랑키주의는 노동자 대중의 직접적인 계급행동을 고려에 넣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또한 대중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광범한 인민대중은 혁명의 그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전투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더우기 사전행동이라고 하면, 극소수인원에 의한 혁명적 기습공격의 준비만으로 그쳤다. 때문에 이런 일정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을 인민대중과 철저히 분리시키는 것이 그들이 임무달성을 위해 우선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가능했고 또 실행됐다는 것은, 블랑키주의자적 조직의 음모적 활동과 인민대중의 일상생활사이에 아무런 내적연관(內的聯關)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전술이나 활동의 세부적인 임무도 이런 것이 기본적인 계급투쟁 기반과는 관련성 없이, 제멋대로, 잔재주로, 속제(速製)로, 사전에 세부문제까지 계획되어 일정한 플랜으로 고정되었고 또 결정되어 있었다. 때문에 조직내 활동멤버들은 당연히 자기활동분야 이외에서는 사전에 결정된 의지의 순수한 집행기관, 즉 중앙위원회의 도구로 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도 음모자적 중앙집권주의의 제2의 모먼트가 주어졌다. 즉, 당의 개별기관은 그의 중앙기관에 절대적ㆍ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 그리고 이 중앙기관의 결정적인 권능이 당조직의 최외연부(最外緣部)까지 파급확산된 것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조직문제, 1904, 로자 룩셈부르크선집 제1권, pp. 252〜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