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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오브라첸스키 ] (Preobrazhensky, Evgeny Alexeyevich)

1886년 러시아의 오리올 지방에서 태어나 1937년 사망하였다. 17세에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으며, 우랄에서 처음으로 볼세비키 활동을 시작하여 내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1920년에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잠시동안 세 명의 당 서기 중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당내 좌파 반대파의 지도적인 경제이론가로서 그는 산업화를 강조했으며 국가의 경제적 어려움과 스탈린 지도 하의 당생활의 관료화를 연결시키려고 했다. 산업화를 더욱 강조하면서 프레오브라첸스키는 트로츠키와 결별하고 스탈린과 손을 잡은 최초의 좌익 반대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에 재입당했다가 1931년에 다시 숙청되었고 1932년에 다시 복권되어 1934년에 1920년대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였으나 1935년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937년에 감옥에서 약식재판으로 총살되었다.(Haupt and Marie 1974)
프레오브라첸스키는 고립된 후진 농업국의 인플레인션과 산업화의 재원에 대한 논문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소련 경제가 전쟁과 내전으로부터 회복되기만 하면 공업 능력을 제고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즉 그것은 바람직한 산출 유발 효과가 실현되기 훨씬 이전에 수입 유발 효과가 느껴졌던 투자였다. 그러한 결과로서 인플레이션의 불균형은 노동자·농민 동맹을 위협하여 1921년에 레닌에 의해서 확립된 신경제정책의 경제 및 정치적 토대를 위태롭게 하였다. 프레오브라첸스키는 인플레이션적인 불균형은 어쨌든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토지 혁명은 자영 농장 구조를 창출하였고 농민들은 자신이 생산한 것들을 더 많이 소비하는 데 익숙해졌으며, 자신의 잉여물을 도시에서 공업 상품과 교환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13년의 생산수준으로 회복되었으나 경제는 산업능력에 있어서의 어떠한 증가에 의해서도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산업상품에 대한 수요가 실질적으로 증가되었다. 프레오브라첸스키는 '전쟁 전의 비율로 산업생산과 농업생산의 시장 분배 사이에 평형을 유지하는 것은 … 농촌의 유효수요와 도시의 상품생산 사이의 평형상태를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다.'(1921∼27, pp. 36∼7)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결국 산업상의 시설에서 필요한 증가치를 유발할 산업 투자는 산업상의 능력과 유효수요간의 부족분을 악화시킨다. 중공업 시설 확충을 위한 대규모의 투자 증대가 요구되지만 이것에 필요한 자금이 지나치게 소규모인 산업부문 자체 내에서 충당될 수 없었으며 또한 정치적 보이코트와 농산물 수출의 수입자금 충당의 한계성 때문에 외국으로부터의 자금 조달도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농업부문은 투자 증대의 부담을 져야 했다. 이것은 농민의 과잉수요의 일부를 소비로부터 투자로 전환시킴으로써 가능하며 이는 동시에 소련 경제의 인플레이션적인 불균형을 해결하게 될 것이다. 국가 독점 무역은 시장구조를 대치하여 낮은 가격에 농산물을 구매하고 높은 가격에 공업 상품을 판매하여, 국가 산업과 사적 농업 간의 교환율을 국가에 유리하게 전환시킬 것이다. 프레오브라첸스키는 국가에 의한 독점 가격 정책을 통한 이러한 불균등 교환구조를 《자본론》Ⅰ권(특히 24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본원적 축적이라고 했던 것을 유추하여 '사회주의의 본원적 축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축적의 방법에 있어서는 유추의 어떠한 제시도 없었다. 이 정책은 부유층 농민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어서 농촌 자본주의 성장의 위험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프레오브라첸스키의 견해에 반대한 사람은 부하린이었다. 부하린은 농민들은 균등한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들의 잉여분을 시장에 판매하지 않을 것이며 계획경제는 '통제가 자발적인 것이라면 그 자체로도 확립될 수 있는 (사후(事後)의) 것에 대한 기대'라고 주장하였다.(Brus 1972, p. 54) 그러나 프레오브라첸스키의 사회주의의 본원적 축적의 법칙은 상품 생산과 사적인 소유 관계의 유지로부터 추론한 조정자로서의 '가치법칙'과 공존하거나 모순되는 경제적 조정자였다. 따라서 두 개의 조정자에 대한 그의 테제는 이행기에 있어서 사회화된 생산관계와 사유화된 생산관계의 대립을 포착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었다.(→사회주의로의 이행)
프레오브라첸스키의 경제학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제국주의에 대한 언급을 전제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는 보다 확대된 민주화를 일관되게 옹호했고 소련의 산업화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간주했으며 이러한 수단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일국 사회주의'의 원리에 반대하여 혁명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사회주의 혁명과 고립되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건설하는 것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이것과 다른 관점을 이해하려면 Day 1973, 1975을 참고하고, 이것에 반대되는 관점에 대해서는 Filtzer 1978을 참고하시오.)
프레오브라첸스키는 20세기의 가장 창조적이고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소련 경제의 구체적 분석에서 재생산 표식의 사용, 이행의 이론화, 두 조정자에 대한 테제,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경제적 형태들에 관한 일관된 주장, 산업화의 가능성에 대한 분석 등은 마르크스의 경제학을 발전시킨 드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게 하고 있다.(→볼세비즘 ; 공산주의 ; 프롤레타리아 독재 ; 농민 ; 스탈린주의 ; 저개발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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