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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르텐과 그 후계자의 미학] ()



1) 바움가르텐 (Alexander Gottlieb Baumgarten,1714~1762)

바움가르텐이라는 이름은 우선 미학*(aesthetica, Ästhetik)의 명명자로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공적은 실질적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으로 미학을 철학체계의 일부분으로서 자리매기고, 거기에 고유한 대상영역을 할당하여 그 학적 기초를 확립했다.
(1) 바움가르텐은『미학』(Aesthetica,Ⅰ.1750,Ⅱ,1758)첫머리에서 “미학은 감성적 인식의 학(學 )이다”(Aesthetica est scientia cognitionis sensitivae)라고 정의하였다. 이 정의는 그의 미학체계의 기본구상을 보여 주고 있다.
감성적 인식의 개념은 라이프니쯔=볼프의 표상이론에서 유래한다. 볼프(Chrisrian Wolff, 1679~1754)에 의하면, 상위(上位) 표상능력은 순수하게 개념적인 조작에 의해 이론과학의 영역을 형성하고, 하위 표상능력은 상위 표상능력을 통해 부여된 개념을 경험적으로 확인하는 경험과학의 영역을 형성하는 것이어서 양자는 서로 대응관계에 있다. 바움가르텐은 미학을 후자에 빗대어서, 거기(미학)에 하위의 논리학으로서의 지위와 성격을 부여했다. 그는 이것을 통하여 종래 철학에서는 가치가 별로 없다고 생각되던. 그러나 정신생활의 대부분을 이루는 감성적 인식의 영역에도 일종의 법칙성이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이것을 학적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종의 인식능력을 의사이성(擬似理性)이라고 부르고, 미학을 의사이성의 학(Ars analogi rationis)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렇게 설정된 미학은 원래 미와 예술의 이론을 그 일부로 하는 감성적 인식 일반의 이론이기 때문에, 보다 좁은 의미로 미학 고유의 영역을 한정시키기 위하여 그는 완전성의 개념을 도입하여, 미를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이라고 규정했다.
(2) 바움가르텐은『철학적 성찰』(Meditationes Philosophicae, 1735)에서 시를 완전한 감성적 언어(oratio sensitiva perfecta)로 정의하고 있다. 감성적 언어라고 하는 것은 감성적 표상을 표현하는 단어의 연결이며, 그 모든 부분, 즉 ①감성적 표상, ②그 결합, ③단어가 서로 어울려 감성적 인식의 전달에 성공하게 되면 완전하게 된다고 간주한다. 당시에 완전성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라이프니쯔(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의 ‘다양성 속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움가르텐 역시 이러한 규정을 받아들여 시에서는 그 주제가 위의 3요소를 통일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주제를 여타의 표상들에 대하여 충분한 이유를 갖는 표상이라고 하였다.
『미학』에서는 이상과 같은 시에 대한 정의가 보편화되어, 미는 ①감성적 인식 ②질서(ordo) ③표현(signa)의 조화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3요소는 완전성에 기여하는 한 미적이다. 이들 중에서 ①감성적 인식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은 다른 두 요소를 규정하는 자리에 놓이며, 또한 그 자체도 완전성을 지녀야 한다. 이리하여 그것은 기능적인 측면보다도 오히려 내용의 측면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지고 그 자체가 완전한 의식 내용으로 된다. 이런 점에서 완전성은 독자적인 미적 내용을 향한 요구이다. ②질서는 상술한 주제에 맞는 감성적 인식의 배열이며, 예술의 형식적 측면을 의미한다. 질서의 일반적 원리는 곧 의사이성인데, 바움가르텐은 이것을 ‘완전성 규정율’(ratio perfectionis determinans)이라고 불렀다. ③표현은 단어 ․ 음 ․ 색채 등을 의미하며, 감성적 인식에 적합한 것이라야 한다. 따라서 완전한, 즉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감성적으로 인식된 통일적 전체이다. 이 전체는 주제에, 또한 서로 간에 조화로운 관계에 있는 ―그 자체가 완전한 ― 감성적 인식들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감성적 인식은 각기 적합한 표현을 갖고 있다.
그런데 라이프니쯔의 ‘다양송 속의 통일’은 원래 형이상학적 원리이기 때문에, 바움가르텐도 『형이상학』(Metaphysica,1739)에서 이것을 수용하고 있다. 여기서 미는 현상의 완전성(perfectio phaenomenon)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감성적으로 현상한 형이상학적 실체이다. 따라서 주제의 통일은 개개의 작품을 그때 그때 규정하는 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에도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게 되면, 자연의 모방은 우주의 내적 원리에 일치된 주체의 미적 ․ 창조적 능력들의 조화로운 발현을 기약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예술가의 창조력은 신적 기원으로 귀착된다. 그런데 『미학』에서는 ‘자연스러움’의 개념에 새로운 요소가 부가되어, 소재의 충분한 인식과 주체의 미적 능력 및 사회 일반의 취미야말로 ‘자연스러움’의 보증으로 된다.
(3)바움가르텐은 직관적 ․ 구체적 표상 외에 감수성(repraesentatio sensualis) ․ 정서(affectus) ․ 상상(phantasma) ․ 허구(figmenta)를 감성적 인식 속에 포함시킨다. 감수성은 변화의 표상이라고 설명되는데, 당시의 용어법에 의하면 감관지각 및 쾌 ․ 불쾌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서는 선 ․ 악의 혼란된 표상이며, 쾌 ․불쾌감이 강렬한 단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상상은 과거에 대한 표상, 즉 재생산된 것이며, 허구는 표상을 일단 분해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바움가르텐은 감성적인식 자체의 완전성의 요건으로서 ‘풍부함’(ubertas) ․ '위대‘(magnitudo) ․ ’진리‘(weritas) ․ '광휘’(lux aeshetica) ․ '그럴듯함‘(persuasio)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때 그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미의 자율성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미가 참된 것이나 윤리적인 것과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분명 많은 사물이 상위 및 하위 인식 능력의 양쪽 영역에 걸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진(眞) 혹은 선(善)으로서 인식된 대상이 동시에 미적으로도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풍부함’이란 감성적 인식을 구성하는 표상이 다수라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바움가르텐은 독자적으로 이것을 내포적 및 외연적 명료성(intensiva et extensiva claeitas)으로 구별해내고 있다. 내포적 명료성은 이성적 인식이 목표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성(distinctio)에 도달하지만, 미적 인식이 지향하는 것은 와면적 명료성이다. 이것은 많은 특징을 하나의 전체 속으로, 그것들을 상호 분명하게 식별하지 않은 채, 삼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 결과 전체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것으로 된다. 이리하여 개성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보다, 또 명료한 것은 불명료한 것보다 각기 미적이다. 이와 같은 구별에 의해서 미는 진(眞)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진다.
‘위대’는 자연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으로, 그리고 후자는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양분된다. 자연적 위대는 본래 전적으로 도덕과 무관한 것, 소극적 위대는 단지 도덕에 저촉되지만 않는 것, 적극적 위대는 도덕과 적극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적이기 위해서 반드시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바움가르텐은 미적 완전성이 악(惡)에 의해 손상된다는 것과 미는 도덕적 위대에 의해 더욱 고양된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미가 선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리’는 우선 논리적 진(眞)과 미적 진(진실스러움)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구분은 엄밀하지 않다. 즉, 논리적 진도 감성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서는 미적이라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미적 진은 이 세계에서 가능한 것, 즉 사실의 진과, 다른 세계라면 가능한 것, 즉 이(異)세계적 진으로 구분된다. 이(異)세계적 진은 상상력에 활동의 여지를 제공하는데, 이것은 다시 “내적 모순을 포함하는 것은 미적 진으로부터 제외된다.”는 규정에 의해 제약된다.
또한 ‘광휘’는 명료성 및 그 급속한 변화가 야기하는 활기를 의미하며, ‘그럴듯함’은 미적 진과 명료성이 제공하는 진실스러움의 인상이다.
이러한 다섯 개의 규정은 주관적 및 객관적 측면에서 분석되고 (pulchritudo rerum et cogitationum, pulchritudo objectorum et materiae), 미적 인식과 소재 사이에는 일반적인 대응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미를 일종의 인식으로 보는 바움가르텐은 미가 물론 단순한 주관적 현상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객체로만 환원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미적 완전성은 거기에 상응한 소재의 미적 성격과 주체의 미적 능력의 완전성, 즉 개개의 능력의 탁월성과 그것들의 상호조화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대응관계 속에서 주체의 자유로운 창조가 어느 정도까지 용인되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18세기의 철학계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대립을 둘러싸고, “비합리적인 것 ․ 직접적인 것은 객관적 확실성을 지니는지 지니지 않는지”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이프니쯔 = 볼프 철학을 받아들였던 바움가르텐은 합리주의 확대를 꾀하는 선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여, 미의 논리적 성격을 주장하고 미학을 일종의 논리학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이 갖고 있는 모순은 완전성의 개념에 미의 직관성에 대한 요구를 삽입시키는 것으로, 미학을 논리학으로부터 일탈시킨다. 왜냐하면 감성적 인식에 전술한 바와 같은 미적 성격을 요구하는 것과, 감성적 인식 상호간의 결합에 대한 법칙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당연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후계자들의 미학에서는 그것의 논리학으로서의 성격과 위치가 퇴색하고, 미의 직관성 ․ 주관성이 한층 강조된다.

2) 마이어 (Gerorg FreiedrichMeier, 1718~1777)
마이어는 대부분의 미학계를 스승인 바움가르텐에게서 왔기 때문에, 그의 경우에도 미학은 하위인식능력의 논리학이고, 미는 일종의 직관적 인식이다, 그런데 그는 바움가르텐과 마찬가지로 미적 인식의 다섯 가지 규정을 열거하면서, 동시에 새로이 ‘생명’(vita)을 다른 것과 동렬에 놓고 있다. 이것은 이미 인식과 직접적 관계를 갖지 않는 것으로서, 정서에 근거하는 것이며, 욕망과 혐오감에 호소하여 사상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미의 주관적 파악 쪽으로 한층 기울어져 있다.
그에 의하면 미는 불명료하게 또는 감성적으로 인식된 완전성인데, 만일 이것이 명료하게 인식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불명료한 인식으로 된다. 그는 ‘다양성 속의 통일’을 목적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통일된 전체가 불명료하게 인식될 때, 이 완전성이 미이며, 또한 목적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미도 커진다고 말한다. 계몽주의자인 그는 예술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선을 가르치는 수단이며, 그 목적은 도덕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미와 진, 그리고 선을 이론적 근거로 구별하는 것 자체가 그의 일차적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3)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1786)

멘델스존은 미와 완전성을 구별한다. 양자는 모두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지만, 완전성이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임에 반해, 미는 감각적 능력에 의해 수용되는 것이다. 대상은 그 형식 ․ 비율이 감각적 인상에 형평과 질서를 부여할 때 아름답다. 멘델스존은 미의 주관적 인상에 주목하여, 인식이 아니라 감정에 미의 기초를 두고 있다. 그도 역시 감성적 인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정서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감정 ․ 정서 ․ 쾌감 등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고 미를 이러한 영역들 속에 자리매기지만, 나중에는 미적 판단을 자율적인 쾌 ․ 불쾌의 감정에 귀착시켜, 이성 ․ 의지 ․ 감정이라는 정신능력의 3분법에 이르게 된다.
예술과 자연은 공히 다양성 속의 통일을 보여주지만 예술은 자연과 달리 무엇보다도 인간적 차원에서 미를 실현시켜야 하는 것이고, 단순한 자연의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으로부터 창조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신이 자연을 창조하듯이 예술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4) 줄쩌 (Johann Georg Sulzer, 1720~1779)
줄쩌는 비합리적인 것, 경험적인 것이 갖는 객관적 타당성의 문제에 대하여 바움가르텐과는 반대의 방향에서 접근하여, 감정에 근거한 직접적 판단이 가능함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에게 있어서는 상위 및 하위인식 능력의 구별은 더 이상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즉, 미를 파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는 예술의 본질을 감정(Empfindung)의 환기에서 찾으며, 감정을 인식으로부터 구별한다. 인식이 대상에 대한 의식을 항상 동반하는 데 반하여 감정은 대상이 주체 내에 야기시킨 내적 변화에 대한 자각이다. 감정이 주관적 인상이고 대상의 본질에가 아니라 그의 현존에만 관계하는 것이라면 감정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형식만이 현존하면 충분하다. 대상의 형식이 인상을 통일시킬 만큼 질서 정연하게 통일되어 있다면, 그 대상은 순수하게 미적인 쾌락을 줄 수 있다.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이 단순미(das bloß schöne)인데, 이것은 단순한 감각적 쾌락과 완전성의 인식에 따르는 쾌락, 이 양자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줄쩌는 진정한 계몽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로부터 미의 절대적 자율성을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그는 때때로 자율적 능력으로서의 취미를 고찰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취미를 인륜적 감정(das sittliche Gefühl)에 종속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직접적인 미적 판단이 도덕적 기준과 모순되지 않는 이유는 자연의 존재방식에서 찾아진다. 자연은 그 본질상 산하며, 또한 자연은 선에 아름다운 형식을, 그리고 악에 추한 형식을 부여하여 인간을 선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의 원리는 예술의 규범으로 되고, 예술은 도덕적 내용에 아름다운 형식의 옷을 입히고 선에 이르는 길을 꽃으로 장식하는 봉사자이다.
바움가르텐과 그의 후계자들의 미학은 비록 후에 칸트의 비판주의 미학에 의해서 극복되기는 했지만, 미를 감성적 인식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멀리는 휘슬러와 크로체의 주장과 연관되고, 또한 예술을 형상에 의한 인식으로 보는 소비에트의 미학사상과도 통하는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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