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책 처음으로 | 사전 | 자유게시판 | 회원자료 | 로그인

 

       ■ 의견바로가기

[윈스턴 스펜서 처칠] ((Churchill, Winston Spencer; 1874-1965))

20세기 제국주의 정치가를 이끌었다. 귀족적인 가족에서 태어나서 하로우(공립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900년에 보수당으로 의회에 입당하였으나 1906년에 자유당에 가입하였다. 1908년부터 상공장관으로서 노동력 교환의 도입에 대해 책임을 졌다. 1910년에 내무장관이었다.

1911년 광부와 의사들의 파업을 중지시키기 위해 병사들을 지휘하였다. 개인적으로 런던 신디 거리에 무장한 무정부주의자의 그룹의 격렬한 죽음을 다스렸다. 1919-21년에 전쟁과 공군에서 총책임을 맡았고 극렬주의자들은 R.S.F.S.R에 대항하여 즉각적인 실질적인 무장된 개입을 지지하였다. 1924년 후에 선거는 1924-29년의 볼드윈 Baldwin 내각에 재무장관으로서 보수당으로 되돌아갔다. 수출가격을 올리고 광부와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임금 동결을 이끈 1925년의 금본위제로의 회귀에 책임을 졌다. 1926년 총 파업동안 그는 영국 신문인 반노동자 파업반대 정부 신문을 조직하였다.

그의 히틀러, 뮌헨 조약과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에 반대를 포함하는 많은 요인들이 그를 보수당 안에 고립시켰다. 1939년에 전쟁의 발발로 그는 영국 내각으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영국 해군을 맡았다. 그는 1940년 5월에 네빌 체임벌린 정부의 추락으로 수상이 되었고 연립 정부를 건립하였다. 노동당의 클리멘트 에틀리 Clement Atlee는 옥새상서(하원에서 정부 일을 책임 맡았다)와 후에 수상 대리가 되었다. 처칠은 무솔리니의 초기 숭배자였고 "로마의 천재"를 언급하였다. 그는 통상 이탈리아는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해서 안 된다고 생각하였고 1940년 6월에 이탈리아에 전쟁선포를 하기 전에 무솔리니가 중립을 지키도록 필사적으로 유인을 시도하였다. 1945년 총 선거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무참히 패배하였다. 그는 1951-55년 영국 수상의 마지막 시기로서 역할을 하였다.



■ 인접어

요한 바코펜
요한 필립 베커
월터 크레인 (1845-1915)
웨이크필드
웰링턴 공작
윈스턴 스펜서 처칠
윈스턴 스펜서 처칠
유신론
이론
이론과 실천
이론적 이데아

뒤로
■ 의견

 



HOME - 후원방법 안내 - CMS후원신청 - 취지문 - 사용 도움말 - 회원탈퇴하기

2002 노동자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만들기 모임
120-702 서울시 중구 정동 22-2 경향신문 별관 202호 44
laborsbook@gmail.com
모바일버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