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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 Kommunismus , communisme )

목차

  1. 【Ⅰ】 어의
  2. 【Ⅱ】 역사적 개관
  3. 【Ⅲ】 맑스의 공산주의


맑스가 취한 사회혁명의 입장. 다만 공산주의에 대한 맑스의 생각은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공산주의 그 자체도 그것을 주창하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다양하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는 공산주의라는 것은 창출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나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운동이라고 말하고 있다[37]. 이러한 생각에 따른다면, 공산주의가 시대상황이나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학설이 통일되지 않았다고 비난받을 이유도 없게 된다. 그렇지만 사적 소유의 부정에 의한 평등사회의 실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한다.

【Ⅰ】 어의

공산주의라고 번역되는 구미어는 모두 라틴어인 communis에서 유래하며 공동이나 공유를 의미한다. 그랑종의 연구에 따르면 코뮤니즘보다 코뮤니스트라는 말이 일찍부터 사용되고 있는데, 그 가장 이른 사용례는 실비 부자가 쓴 『이성의 책』(1706)에서 발견된다. 다만 거기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배려하는 양식 있는 사람의 다른 표현으로서 사용되고 있으며,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정도의 의미다. 이 용어에 완전한 평등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바뵈프인데, 그는 1793년에 평등클럽을 코뮤니스트의 클럽이라고 바꿔 말하고 있다. 

바뵈프는 평등원리를 제1원리로 삼은 인물로서, 바뵈프주의를 완전평등주의라 부르며, 나아가 그것을 공산주의로 바꿔 말하는 예가 1840년대의 문헌에서 적지 않게 보인다. 빈의 자코뱅파 헤벤슈트라이트는 재산공유를 주장한 사람인데, 같은 파에 속한 리델이 1794년에 쓴 심문조서에서는 헤벤슈트라이트주의를 공산주의라고 바꿔 말하는 예가 있다.

또한 부오나로티가 1828년에 정리한 『바뵈프의 이른바 평등을 위한 음모』에는 평등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노동과 향유의 공동을 내세운 문헌이 있으며, 이상과 같은 재산공유에 의한 평등사회의 실현, 노동과 향유의 공동에 기초하는 공동체 형성이 그 후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통된 이해의 바탕이 되었다. 드 비트리의 『공산주의란 무엇인가』(1848)라는 소책자에는 "공산주의는 분배가 아니라 생산력의 협동화이고, 부의 유포가 아니라 집중이며, 개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이다"라는 문장이 보이는데, 이것은 공산주의의 독자성의 강조로도 그것에 대한 비난으로도 읽을 수 있다. 

재산공유제만을 공산주의의 원리라고 한다면, 예를 들어 수드르의 『공산주의의 역사』(1849)처럼 라케다이몬과 크레타 섬의 공산주의에서 시작하여 플라톤의 공화국, 기독교, 위클리프, 후스, 뮌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 모렐리, 마블리, 루소 등도 바뵈프나 카베 등과 나란히 모두 공산주의에 들어가게 되며, 나아가 레보의 『현대의 개혁가』(1840)처럼 여기에 해링턴의 오세아나, 프랜시스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 디포의 무인도, 페늘롱의 쾌락도, 생피에르, 레티프 드 라 브르톤느 등도 포함할 수 있고, 또한 디거스의 농촌공산주의도 포함하게 됨으로써 그 범위가 얼마든지 넓어지게 되어 끝이 없게 된다. 

이와 같은 경향을 로렌츠 슈타인은 『오늘날 프랑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1842)에서 비판하는데, 이들 유토피아 사상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혼재시키는 것은 후자를 그것이 발생하는 사회적 배경으로부터 단절시켜 생각한 결과로서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Ⅱ】 역사적 개관

1845년경까지 슈타인과 엥겔스를 예외로 하여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고서 이해되어 왔다. 예를 들면 로버트 오언은 『마인츠 신문』 1840년 3월호에 게재된 「로버트 오언과 사회주의」라는 익명의 논문에서 평등주의 입장에 서서 여성과 지상의 모든 재산의 공유를 주창한 사회주의자로서 소개되고 있는데, 이듬해 3월 21일자로 샤퍼 등이 쓴 「영국에서의 사회체제의 진보」(1842년 5월에 간행된 『젊은 세대』 제5집에 수록)에서 오언은 재산공동체의 원칙을 설파한 영국의 공산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뵈프 및 바뵈프주의자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자로 불리고 있었다.

카베는 1840년 1월에 『이카리아 기행』이라는 대저를 공간하여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성과 그 유토피아 사상과의 차이를 해명하고 있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왜 나는 공산주의자인가』, 이듬해에는 『공산주의 신조 고백』을 발표하는 등, 프랑스의 공산주의 역사 속에서 데자미나 게이 등의 신바뵈프주의자를 제치고 스스로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냈다. 평등주의, 생산과 향유의 공동이라는 것 이외에 카베의 공산주의에서 새로운 것이라 한다면, 우애의 강조와 노동의 조직화, 교육의 평등화 등을 들 수 있다. 영국에서는 오언 및 오언주의 외에 1840년에 바름비에 의해 공산주의 보급협회가 설립되었다는 점, 차티스트의 운동이 공산주의와 동일시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 런던을 중심으로 슈탐비츠나 샤퍼 그리고 엥겔스와 맑스 등의 독일인이 공산주의 결사를 만들어 활동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독일의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은 편력직인인 바이틀링인데, 그는 프랑스, 스위스, 독일 각지의 노동자나 직인들과 교류하면서 수많은 글을 썼고, 또한 『독일 청년의 구원을 외치는 목소리』라는 잡지를 편집하는 등, 공산주의 보급에 노력했다. 경찰에 압수당한 그의 글이 블룬칠리에 의해 고발의 속셈으로 공표되어 바이틀링의 이름과 사상이 독일 전역에 퍼지는 행운도 있었다(『바이틀링에게서 압수한 자료에 의한 스위스의 공산주의자』). 바이틀링의 경우에는 공산주의를 기독교와 결부시켜 설명하는 방법이 종종 사용되며, 그의 저서 가운데 하나로 『가난한 죄인의 복음』(1845)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다. 이것은 생시몽이나 라므네 등에게서도 나타나는 경향으로 당시는 대중 교화에 유효한 방법이었다.

독일에서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보급에 크게 공헌한 것은 앞서 언급한 슈타인의 저서이다. 그는 거기서 생시몽과 푸리에 및 그 지지자들에 의한 사회주의와, 바뵈프주의 및 카베에 의한 공산주의, 그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는 라므네, 르루프루동, 루이 블랑의 학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최대 공적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현재의 산업사회의 구조 및 그 필연적 결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실태와 결부시켜 이해한 점에 있다. 또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인격적 소유에 대한 평가에 의해 구별한 점도 그 특색으로서 지적할 수 있다.

엥겔스도 이 양자를 일찍부터 구별하여 이해하고 있으며, 1844년 4월경에 작성되었다고 생각되는 「독일에서의 공산주의의 급속한 발전」에서, 사회주의는 공동사회제도까지 나아갈 결심을 하지 못하는 막연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고[2:546], 그에 맞선 공산주의를 라인 공업지대에서의 그의 실천 활동에 입각해 소개하고 있다. 엥겔스는 또한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1845)에서, 사회주의의 출신은 부르주아지이며 공산주의와 융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쓰고 있다[같은 책:473]. 엥겔스에 의한 이와 같은 구별 제시가 맑스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맑스에 대해서는 뒤에서 서술). 

아우구스트 베커는 1844년에 공산주의에 대한 논문을 3편 발표하고, 거기서 공산주의는 평등의 자연권에 기초한 공동체학설을 가리키며, 형제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만인의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미히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인간주의」(1845)에서 앞서 언급한 엥겔스의 사회주의 비판을 어리석은 자만심이라고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주의로 해소된다고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 그에 대한 반비판이 실려 있다.

1845년경부터 공산주의는 일반적으로도 사회주의와 명확히 구별되기에 이르며, 또한 그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45년 12월에 맑스와 엥겔스 등에 의해 브뤼셀에서 공산주의 통신위원회가 조직되고, 또한 1836년 이래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던 의인동맹은 1847년 6월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명칭을 바꾼다. 그리고 그 강령으로서 맑스와 엥겔스가 연명으로 쓴 『공산당 선언』이 48년 2월에 런던에서 공간된다. 그러나 이로써 공산주의가 맑스와 엥겔스에게 독점된 것은 아니며, 때마침 같은 해 2월의 파리, 3월의 베를린에서 시작된 혁명(1848년 혁명) 속에서 공산주의 각 파벌은 세력을 넓혔으나, 동시에 또한 그 패배에 의해 공산주의 운동 총체가 재점검을 촉구 받았다. 혁명 후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혹은 새로운 사회건설의 장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활동가들이 거기서 각각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의 실현을 지향했다.

【Ⅲ】 맑스의 공산주의

엥겔스를 만나기 전까지의 맑스는 공산주의에 대해 부정적 내지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맑스가 공산주의에 긍정적 · 적극적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은 이른바 『경제학 · 철학 초고』(1844)부터이다(그 상세한 집필 시기는 불명확하다. 44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엥겔스와의 공저 『신성 가족』에는 이미 공산주의를 유물론과 결부시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보인다). 

『경제학 · 철학 초고』에서 맑스는 종래의 공산주의를 조야한 공산주의라고 비판하며 인간의 자기소외로서의 사적 소유의 적극적 지양인 공산주의를 새롭게 제기하고, 그것을 인간과 자연 간의, 또한 인간과 인간 간의 투쟁의 참된 해결이자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이라고 하고 있다[40:457]. 다만 그는 동일한 초고모음 속에서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것을 상정하고, 그것과 비교하면 공산주의는 아직 역사적 발전의 필연적이고 현실적인 계기이며, 인간적 발전의 도달 목표나 인간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쓰고 있다[같은 책:467].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1844)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설 것을 선언한 맑스는 엥겔스와의 공저 『독일 이데올로기』(1845)에서 공산주의를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과 결부시켜 이해하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을 창출되어야 할 상태, 즉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운동이라고 하며, 종래의 모든 생산관계들 및 교통관계들의 기초를 뒤엎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134].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생산관리에 의해 각 개인은 임의의 부문에서 자기형성을 이룰 수 있으며,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하고,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가축을 몰고 식후에는 비판을 한다"[같은 책:34]라는 꿈도 언급되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는, 공산주의는 유령이라 불리는 메르헨이 아니라 이제 엄청난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최후의 계급투쟁이 되어야 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의해 부르주아 사회를 계급대립과 함께 지양하여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아소시아시옹을 형성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4:475, 496]. 그런 다음 지금까지의 다양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세력들을 모두 반동적, 봉건적, 소시민적, 보수적, 부르주아적, 유토피아적 등등의 형용사를 붙여 비판하고 있다. 이 『선언』의 영향력은 대단히 커서 그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공산주의라 하면 맑스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시바타 다카유키()

[네이버 지식백과] 공산주의 [共産主義, Kommunismus, communisme]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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