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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보안사령부(國軍保安司令部)] ()

국군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197710월 육군, 해군, 공군의 각 군별로 구성되어 있던 특무대 혹은 방첩대가 통합되어 새로운 부대로 창설된 것이다. 방첩대의 역사는 8.15해방 직후 미군의 진주와 함께 시작되었으므로 1961년 창설된 중앙정보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뿌리가 깊은 군의 정보 및 첩보기관이다. 군의 첩보부대는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이 실시되면서 군정 법령 제28조에 의거하여 정보과로 출발, 북한에 대한 첩보활동과 북한의 대남 공작활동에 동시에 대응하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며, 1947년에는 국방경비 대외 정보처로 승격되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국군이 창설되면서 국군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정보업무의 중요성이 가중되면서 정보국은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독립하여 악명 높은 특무대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강화되었다. 특무대가 악명을 얻게 된 것은 당시 특무대장인 김창룡 중장이 대공 사찰을 빌미로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용공좌경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투옥 및 사형을 시킨 데서 연유한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을 유지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특무대는 4월 혁명 후의 민주당 정권에 의해 19607월 그 기능을 대공첩보의 고유한 영역에 한정시키면서 방첩대로 개칭되었다. 쿠데타와 동시에 등장한 5.16군사정권은 방첩대의 기능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정보정치에 의한 테러 독재를 수행했으며, 유신체제의 등장과 더불어 강력한 정보업무의 수행을 위해 197793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방첩대를 통합하여 국군보안사령부로 발족, 국방부의 직할부대로 편제시켰다. 대통령령 제8704호에 의해 발족된 보안사는 중앙정보부와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국가권력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유사시 정보부, 검찰, 경찰을 지휘 통제할 수 있도록 제도화된 것은 12.12쿠데타를 가능케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국방부 직할부대로서 군사에 관한 정보수집 및 수사를 목적으로 통합된 보안사는 정치군부가 197910.26사태 이후 12.12쿠데타를 일으키고 5.17계엄확대조치를 거쳐 정권을 장악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보안사는 5.17 이후 언론 통폐합의 계획과 집행, 언론인 대량해직, 8천 명에 달하는 공직자 숙정, 삼청교육대 학살 등 전두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는 일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뒤를 이은 노태우 사령관 당시에도 언론 강제 통폐합의 집행과 함께 불교계의 정화란 명목하에 전국 사찰에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을 난입시켜 승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연행하여 고문을 자행한 이른바 ‘10.27 법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5공화국 창출의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보안사는 12.12사태 및 5.17 당시의 사령관과 핵심참모 등이 청와대와 민정당으로 위치를 옮긴 뒤 노태우, 박준병을 비롯 안필순, 이종구, 고명승, 최평욱, 조남풍 사령관으로 이어지면서 국가권력을 유지시키고 강화하기 위한 기능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정치지형이 협소한 한국의 정치구조에서 보안사는 국가권력의 폭력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정보 수단으로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와 쌍두마차를 이룬다. 국가안전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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