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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甲申政變)] ()

한말 수구파와 개화파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개화파가 수구파를 살해하고 고종을 유폐, 3일천하를 이룩한 사건을 말한다. 고종19년(1882)에 있었던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청·일 양국이 한국을 둘러싸고 대립할 무렵, 정계는 수구파와 개화파로 나뉘어 있었는바, 수구파를 사대당(事大黨),개화파를 개화당(開化黨)이라 했다. 수구파에는 閔泳翔 · 閔升鎬를 위시한 閔妃일파와 金允植 · 魚允中 등이며 개화파는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다녀온 바 있는 金玉均 · 朴泳孝 · 洪英植 · 徐光範 · 徐載弼 · 尹雄烈 등 소장파였다. 개화파는 일본을 본받아 신제도에 의한 혁신정치를 이룩하고자 했으나 수구파에서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더우기 임오군란 이후 일본 세력이 물러간 뒤로는 더욱 더 친청·보수적 성향이 강고하여져 갔다. 이에 개화파에서는 청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대전, 패배하여 위세가 꺾인 틈을 타서 주한일본공사 竹添進一ᅳ郎과 밀의,그들(개화파)이 동원할 수 있는 친군영(親軍營) 군인 500명과 일본공사관의 일본군 150명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 때마침 새로운 관제(官制)에 의해 우정국이 개설,개국기념식에는 내외 고관들이 참석키로 되어 있었다. 개화파는 이 기회를 틈타서 12월 4일 이웃집에 불을 지르고 식장으로 난입, 尹泰駿 · 韓圭稷 · 李祖淵 · 閔泳穆 · 趙寧夏 등을 죽이고 閔泳翔에게 중상을 입혔다. 또한 김옥균·서광범을 비롯한 개화파는 창덕궁으로 들어가 청군이 난을 일으켰다고 허위 보고한 뒤 일본군을 불러 창덕궁을 지키게 한 다음 요인들을 불러들여 살해했다. 개화파는 같은 달 5일 새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좌의정에 李載先, 우의정에 홍영식, 호조참판에 김옥균, 한성판윤 박영효, 좌우양영사(營使)에 서광범 등을 임명하였으며, 6일에는 새 정책목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인천에 주둔 중인 청의 袁世覬가 청병 2,000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들어옴에 따라 개화당정권은 3일천하로 끝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조야에 배일사상이 팽배함은 물론 수구파정부가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박영효 ·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같은 경위를 가진 갑신정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세 가지 시각으로 나뉘어 있다. ①부정적 평가 ②양면평가(그 주관적 의도와 동기만을 긍정하는 시각) ③긍정적 평가(부르조아 개혁설과 부르조아 혁명설). 첫째의 부정적 평가는 주로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취한 견해로서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철저하게 외세의존(주로 일본주한공사)적이었으며 청년측의 개혁운동으로서 세계정세에 어두웠을 뿐 아니라 그들이 귀족자제들이란 사실 이외에는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반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둘째의 양면평가는 논자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그 주관적 의도와 동기는 긍정하되 그 방법과 수단에 있어서의 외세의존성을 비판하는 견해이다. 비록 그 역점을 두는 곳에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오늘날 한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가 이 양면평가이다.
세째의 긍정적 평가는, 1960년 전후로부터 제기되어 1964년에 간행된 『金玉 均』이란 저술에 의해 그 논점이 집약되어 있는 〈부르조아 개혁설〉과 1970년 경부터 제기된 〈부르조아 혁명론〉 또는 〈미완성의 부르조아 정치혁명설〉등으로 대표되고 있지만, 요컨대 갑신정변의 위치를 당시 한국 사회의 내발적 근대화에의 발전과정 위에 설정하여, 봉건제도의 부패와 민족적 위기를 해결코자 한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근대적 부르조아 개혁 또는 부르조아 혁명의 최초의 본격적 시도였다고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견해이다,
물론 후자인 부르조아 혁명설은 전자인 부르조아 개혁설이 김옥균 개인의 역할을 과대평가한 점을 다소 비판하면서,갑신정변이 타협주의적인 개혁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고 본질상 주권문제를 무장정변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상 유일한 〈위로부터〉의 무장정변이었고,봉건제도 그 자체에 반대하여 근대적인 국정개혁을 획책하던 갑신정변이 청국군의 개입 등으로 삼일천하로 끝난 실패요인으로서는, 대체로 정변의 주체인 이른바 〈개화당〉의 양반지주로서의 신분적인 제약과 사회경제적인 기반의 취약성과 더불어 국민 대중과 결합하지 못한 채 외국세력,특히 일본의 군사적인 힘의 지원으로 정권을 장악코자 한 데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삼일천하로 끝난 개화당 정권의 정치적 지표인 갑신정강(甲申政綱)의 내용에는, 대외적인 민족적 측면에 관해서는 친청사대외교(親清事大外交)의 폐지와 더불어 민족의 자립과 정치적 독립이 간절한 과제임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청에 대한 자주성은 강조되고 있으나 일본을 포함한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부재하다.
한편 대내적인 반봉건적 측면에서는 문벌의 폐지, 지조법(地租法)의 개혁, 호조(戸曹)에 의한 국가재정의 통일적 관할,경찰 및 군사제도의 개혁 등을 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의 근대화 개혁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며 핵심적 과제였던 지주세호관계(地主稅戸關係)로 집약적인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와 봉건적 신분제의 폐기 등이 제기되지 않았다. 그것은 근대적 시민계층이 형성되지 못한 역사적 조건과도 관련하여 〈위로부터〉의 근대적 개혁을 단행한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당의 양반지주로서의 신분적 제약성과 현실파악의 한계성을 말해 주는 것이며, 그것이 결국 농민대중과의 단층을 이루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金敬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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