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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江都] ()

과거에 강화도를 달리 부르던 명칭이다 . ' 강 도(江都) ' 라는 이름은 고려 시기 몽골의 침입 을 맞아 강화도로 천도했던 시기부터 사용된 명칭으로 , ' 서경(西京 , 평양) ' 이나 ' 동경(東京 , 경 주) ' 과는 달리 정식 행정 명칭은 아니다.
강화도는 후삼국 시기 ' 혈구진(穴口鎭) ' 이라 불리는 서해의 제 해권과 관련된 주요한 군진 (軍鎭)이었다 . 이곳은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통하는 예성강과 임진강 및 한강 어구의 관문 이라는 군사적 ·경제적 입지 때문에 고려 초 에 ' 강화(江華) ' 로 이름을 고쳤다 . 1018년(현종 9)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 1232년(고종 19)에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군(郡)으로 승격시 키고 ' 강도 ' 라고 불렀다 . 당시 천도는 그전 해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살해 사건을 계 기로 벌어친 제1차 침입이 일단락된 후 무신 집정이었던 최우의 주도 아래 시행된 것으로, 이후 1270년(원종 11)까지 39년 동안 이곳에 도읍하였다 .
천도 당시 궁궐을 비롯하여 여러 절 등이 모두 개경과 같이 설치되어 강화 북산의 이름 도 개경의 송악산을 따서 ' 송악산 ' 이라 하였 으며 , 그 아래 궁궐이 세워졌다 . 이 외에도 오 랜 기간을 거치면서 새로이 축성을 하고 별궁 과 사찰이 건설되었다 . 1237년(고종 24) 강화 외성(外城)이 건설되었고 , 1251년(고종 38)에 
 
는 중성(中城)이 축조되었다 . 개경의 본궐을 모방하여 지은 강화의 본궐 외에도 진암궁(辰巖宮) · 장봉궁(툿峯宮) 등 여러 이궁이 있었으 며 , 고종대 말엽에는 궁궐의 건설을 통해 몽 골에 조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참언에 따라 삼랑성(三郎城) .신니동(神泥洞) 등에 가 궐(假闕)이 건설되기도 하였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군이 들 어와 강도의 성곽을 허물면서 민가에도 불을 질렀는데 , 여러 시설들도 이때 같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 충렬왕대에 인주(仁州) 에 병합되었다가 얼마 후 복구되었으며 , 1377 년(우왕 3)에 다시 부(府)로 승격되었다.
조선 시기에도 ' 강도 ' 는 강화도의 별칭0로 사용되었는데 , 특히 전란으로 수도의 보장처 (堡障處)로 이곳을 주목하던 선조대 이후 자주
사용되었다 . 簪 장지연
[참고문헌]
「高麗史』.
『輓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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