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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1818-1883)] (Marx, Karl)

I 생애

과학적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동시에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제1차인터내셔널의 발기자이며 조직자이다. 마르크스는 181855일 프러시아의 라인 주 트리에르에서 유태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5년 트리에르 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본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에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법학을 공부하면서 역사와 철학에 심취하였다. 1841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과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졸업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대학원과정을 마쳤다. 학창시절 헤겔 좌파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그때 이미 천재적 가능성을 엿보여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1842년에는 베를린 시대 이래의 동료였던 브루노 바우어가 강사로 있던 본 대학의 강사로 대학 강단에 서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4210월 쾰른으로 이주하여 급진주의자들의 신문인 라인신문의 주필로 일하였다. 그 해 가을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기고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처음으로 만나 단시간의 회견을 가졌다. 이 시기에 그는 관념론적 입장에서 벗어나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혁명적 민주주의자로부터 떨어져나와 과학적 공산주의자로 변신하기 시작하였다. 라인신문이 급진적인 논조로 말미암아 프러시아 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아 18433월 폐간되고 얼마후인 그 해 6월 학창시절에 약혼했던, 귀족의 딸이자 4년 연상인 예니 베스트팔렌 Jenny von Westphalen 과 결혼하였다. 184310월에는 파리로 이주하였고 이듬해 2월에는 루게 Ruge, Arnold (1802~1888)와 함께 독불연지를 창간하였으나 1호로 폐간당하고 말았다. 이 잡지에 실린 일련의 논문들인 헤겔의 법철학비판 서설, 유태인문제등에서 그는 현존 부르주아사회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다. 그동안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급진주의자인 루게와 결별하고, 관념론으로부터 유물론, 혁명적 민주주의로부터 과학적 공산주의로의 결정적 이행을 보여준다. 18449월 그는 영국에서 독일로 되돌아가던 도중의 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여 서로간의 이론적 견해가 일치함을 확인하고 동지적으로 결합하면서 학문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가, 이후 40년간에 걸쳐 두 사람 사이에 끊임없이 오고간 편지 가운데 현존하는 최초의 것이다. 그 들은 부르주아지의 매장인이며 공산주의의 건설자로서의 노동계급의 세계사적 역할을 처음으로 천명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로 자본주의적 노예로부터 근로자들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845년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 발생에서 중요한 문헌인 신성가족을 저술하였고, 역시 공동으로 1845년 말에서 18465월까지 약 반 년에 걸쳐, 헤겔 관념론의 청산서라 할 수 있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였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에서 벗어나 사적 유물론의 근본사상을 확립하는 그의 철학적 견해의 정립인 동시에 과학적 공산주의 이론의 토대를 다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저작은 그의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다. 18452월 프러시아 정부의 책동으로 파리에서 추방당하자 브뤼셀로 이주하였다. 이 무렵 그는 바이틀링 등의 진정한 사회주의자들 및 프루동 류의 쁘띠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과 투쟁하면서 엥겔스와 함께 과학적 공산주의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1847년 무정부주의자이며 쁘띠부르주아 사회주의자인 프루동의 저서 빈곤의 철학을 비판하는 저작 철학의 빈곤을 발표하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초를 구축했다. 1817년초 브뤼셀에서 그는 엥겔스와 함께 비밀단체인 의인 동맹(6월대회에서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개칭)에 가입, 2차대회(런던대회)에 참가하였다. 18471129~124일에 열린 이 대회에 참석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동맹의 강령초안을 위촉받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18482월에 "전세계의 노동자들은 단결하라!"는 위대한 국제주의적 호소를 선포한 유명한 공산당선언이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새로운 세계관 즉 사회생활의 분야까지도 포함하는 철저한 유물론, 발전에 관한 가장 전면적이며 심오한 학설로서의 변증법, 계급투쟁과 새로운 공산주의사회의 창조자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역할에 관한 이론을 천명하였다. 프랑스에서 18482월혁명이 발발하였다. 이 무렵 공산주의운동에 자금지원을 한 혐의로 벨기에에서 추방당한 마르크스는 3월초 공산주의자동맹중앙위원회가 열리는 파리로 가서 이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곧이어 독일에서 3월혁명이 발발하자 쾰른으로 가서 엥겔스와 함께 신라인신문을 창간하고 주필로 일하였다. 신라인신문1849519301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독일에서 1848년 혁명이 실패한 후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추방되어 파리로 갔으나 18496월 시위운동이 있은 후 8월말에 다시 영국 런던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살았다. 런던으로 이주한 마르크스는 그곳에서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를 재건하고 9월에는 런던의 독일 노동자교육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신라인신문의 속간으로서 정치경제 평론지의 발행을 준비하여 다음해 3월에 발행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는 뉴욕 트리뷴과 기타 잡지에 정치경제에 관한 평론을 기고하는 한편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동안에도 1849년 말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의 활동이 개시되자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1848~1849년 혁명의 경험을 일반화한 데 기초하여 1848년부터 1850년까지의 프랑스 계급투쟁(1850)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1852)을 집필하였다. 이 두 저작은 유물사관을 역사적 사건의 분석에 최초로 적용한 탁월한 작품이다. 이 두 저작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상호관계,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 문제를 밝혔으며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국가형태를 발전시켰다. 1850~1860년 사이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연구에 주력하여 1859년 그간의 경제학 연구 결과로서 경제학비판을 출판하여 가치론을 체계화하는 동시에 그 서문에서 사적 유물론을 정식화하였다. 이것을 기초로 1867자본론1권을 출간하였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과학적인 정치경제학을 창조합으로써 정치경제학의 일대 변혁을 일으켰으며 자본주의 멸망과 사회주의·공산주의 승리의 필연성을 과학적으로 밝혔다. 자본론에서 그는 유물변증법적 방법을 적용하여 유물변증법의 범주, 법칙과 같은 문제들의 연구를 더한층 심화시켰다. 1850년대말부터 1860년대에 걸쳐 노동운동이 강화되자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목적으로 1864928국제노동자협회(1차인터내셔널)의 창설에 참가하여 선언과 잠정규약을 기초하였고 엥겔스와 더불어 1878928일 제1차인터내셔널이 해체될 때까지 이것을 지도하였다. 그는 제1차인터내셔널을 통하여 노동운동의 분산성을 극복하는 한편 노동운동내의 온갖 기회주의와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면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전술을 작성하였다. 1871년 파리코뮌 (1871318~527)이 일어나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을 집필하여 파리코뮌의 역사적 경험을 깊이있게 총괄적으로 분석하여 파리코뮌이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국가형태의 하나라는 것을 밝혔다. 이후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집필 완성에 주력하였다. 1875년에는 독일 사회주의노동당이 창설되면서 채택한 첫번째 강령에 대해 고타강령 비판을 발표하여,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역사적 필연성 그리고 공산주의사회의 두 단계를 밝혀 과학적 공산주의론을 한층 발전시켰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과업에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 1883314일 운명하였다. 그는 노동계급과 피압박 근로대중의 사회적 해방을 위하여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쳐 투쟁하였으며 열정적으로 이론활동과 실천활동을 전개하였다.

II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견해와 학설의 체계이다. 마르크스는 인류역사의 발전법칙을 발견하였을 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론 및 전술을 제시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 정치경제학 및 정치학의 측면에서 변증법적 유물론, 잉여가치론 그리고 계급투쟁론으로 크게 구성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독일의 고전철학 특히 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에서 유래된 것이고, 잉여가치론은 영국의 고전경제학 특히 아담 스미스와 리카아도의 학설에서 기원하며, 계급투쟁론은 바뵈프 이래 프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과학적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체계화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사회현상의 연구에까지 확장함으로써 사회발전법칙 및 계급투쟁에 관한 법칙인 역사적 유물론을 정립하였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창시는 철학사에서 진정한 혁명적 전환이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사회의 경제적 및 정치적 생활을 전면적으로 연구하여 자본주의의 발생과정, 그 발전의 법칙 및 경향, 그 멸망의 불가피성을 논증하였다. 마르크스 경제학설의 초석은 잉여가치학설이다. 마르크스에 의하여 발전된 유물사관과 잉여가치학설에 의하여 사회주의는 마침내 공상으로부터 과학으로 전환되었으며 과학적 공산주의 이론이 창시되었다. 이로써 자본주의 임금노예제의 본질이 드러남과 동시에 자본주의를 뒤집어엎고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과학적 방도가 천명되었다. 마르크스는 종래의 계급사회의 발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며 따라서 계급사회 발전의 추동력은 계급투쟁임을 밝혔다. 마르크스의 학설은 변증법적 유물론 및 역사적 유물론과 과학적 공산주의 그리고 정치경제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내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전일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다. 마르크스의 학설은 철저한 혁명성과 과학성을 지니고 있어, 지난 100여 년간에 걸친 국제 공산주의운동과 노동운동 발전의 모든 과정은 마르크스 학설의 정당성과 생명력을 입증해주고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 엥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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