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노조운동(敎員勞組運動)] ()
I 성격. 4월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대구에서 결성되기 시작하여 1961년 군사 쿠데타로 해체될 때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된 초·중·고교 교사들과 대학교수들의 조직운동. 교원노조운동은 일제하의 지하노조와 1980년대말의 교직원 노조와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교육 운동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①교원노조운동은 독재권력에 예속되었던 교사집단이 자주성을 확보하려고 한 최초의 교권수호운동이다. 자주적 교원단체를 결성함으로써 1947년에 결성된 대한교련의 어용성, 반민주성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②중앙집권적 관료행정 체제와 유명무실한 교육자치제하에서 만연된 교육계의 비리를 과감히 폭로하고 학원의 정화를 요구함으로써 4월혁명 정신을 계승하고 교육민주화를 실천하였다. ③4월혁명 이후 1년간의 민주화공간 속에서 민주사회주의 정당들, 「민족통일학생연맹」 등의 학생·사회 단체들과 함께 3대 진보세력의 하나로 활동하였다. 교원노조의 결성동기는 네 가지로 집약된다. ①교육의 자주성과 학원의 민주화 ②교원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 ③교육의 질적 향상과 민주적 학생활동의 지원 ④민주주의국가 육성과 세계평화 기여(경북교원노조, 「교원노동조합의 결성동기와 주장」, 1960. 9.13). II 조직. 교원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은 대한노총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미 1958년부터 나타났으나, 정부의 강력한 불허방침으로 저지되었다.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4월 29일과 5월 1일에 대구와 서울에서 각각 「교원노조결성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5월 7일에 전국 최초로 대구에서 「대구시 초등 교원노조」와 「대구시 중·고등 교원노조」가 결성되었다. 그 이후 7월까지 전국적으로 시·군 단위노조와 도 단위연합회가 잇따라 조직되었다. 7월 7일 전국에 산재된 노조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전국조직체로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를 발족시켰다. 이날 전국 위원장에는 건국대교수 조일문, 수석부위원장에는 강기철, 중앙위원에는 계훈제 외 40명이 선출되었다. 총연합회는 도연합회들로 구성되었고 도연합회에는 시·군지구 초등교원노조, 시·군지구 중등교원노조, 대학교수노조가 가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원노조운동의 특징은 단위학교 노조에 가입한 평교사들이 조직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점에 있었다. 공식자료에 따르면 1961년초까지 전국교원 8만 3,490명 중에서 22.37%인 1만 8,678명이 교원노조에 가입했다. 시도별 가입률은 다음과 같다. 경북 63.14%, 경남 57.38%, 제주 14.95%, 충남 11.09%, 경기 5.52%, 전북 4.38%, 서울 2.66%, 전남 2.10%, 충북 0%, 강원 0%(『대한교육연감』, 1960). III 주요활동. (1) 과도정부하의 조직건설과 합법성 쟁취투쟁. 과도정부는 자유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교원노조의 위법성을 들어 불허방침을 견지했다. 과도정부하의 교원노조운동은 합법성 쟁취투쟁에 쏠리게 되었고, 민주적 노동·사회 단체들과 학생들의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의 불허방침이 결정되기까지 정부내에서는 상당한 혼선이 있었다(1960. 5. 9 이항녕 문교부차관 허용의사 표시, 5.18 이병도 문교부장관 불허방침, 6.18 김학묵 보사부차관 허용의사 표시, 6.22 법무부 교원의 노조가입 위법으로 유권해석, 이병도 장관 교원노조 해체지시, 6.23 김성진 보사부장관 정부의 공식불허방침 발표. 이병도 장관 노조가입 교사 파면방침 발표, 6.24 이기주 경남도지사 교원노조 필요하다는 소신을 기자회견석상에서 표명). 정부의 정책이 불허로 기울자 교원노조는 5월부터 7월 사이에 주요조직을 건설하면서 전국적 차원에서 어용교련과 문교부 규탄성명, 궐기대회, 가두시위 등을 벌였다. 6월 24일과 25일에는 체신노조·철도노조 등의 공무원노조가 연대투쟁 성명을 발표하였고, 6월 26일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지지성명을 내는 등 노동단체들의 지지운동이 확산되면서 교원노조운동은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6월 29일에는 노동쟁의지도위원회가 노동조합법 위반으로 문교부장관을 검찰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7월 3일에 대구에서 전국교조대표자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는 학계, 정치계, 법조계 대표들도 참석하였다. 여기서 민주당 선전부장인 조재천은 교원노조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여 곧 집권이 확실시되는 민주당의 정책방향을 예고하였다. 과도정부의 말기인 8월 6일에 경북도 당국은 교원노조 가입교사들을 대거 인사이동하는 초강경책으로 맞섰다. 교원노조는 농성과 궐기대회, 수업거부결의 등의 강경대항을 하게 되었고, 8월 16일 경북고와 경북여고 학생들이 학생들로서는 최초로 지지시위를 벌였다. 이날 경북교조는 도지사를 상대로 인사발령 가처분신청과 행정취소소송을 법원에 제기하였다. (2) 민주당 정부하의 활동양상. 민주당 정부는 결국에는 교원노조의 정당성을 인정했지만 법적 차원에서 유보적 태도를 쉽게 버리질 못했다. 그래서 민주당내의 일부 극우파 의원들과 대한교련, 사친회 등은 교원노조를 좌경으로 규정하고 규제하려는 시도를 했다. 따라서 민주당 정부하의 교원노조운동은 보다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투쟁에 나서게 되었으며, 진보적 단체들과의 연대가 심화되었다. 8월 25일 대구고등법원은 경북교원노조가 낸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인사이동 조치를 정지시켰다. 교원 노조를 불허하는 법적 근거가 미약한 상태에서 시행된 경북도지사의 인사발령에 대해 자유재량권을 남용한 위법사항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불과 이틀전에 수립된 장면 내각은 이날 야간 국무회의를 열어 교원노조 대책을 숙의했다. 9월 7일 정부는 교원노조를 합법화시키기 위한 관계법 개정과 입법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민주당내의 극우파 의원 13인은 9월 13일 노조가입 금지대상에 교육공무원을 포함시키는 내용의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대한교련과 사친회는 교원노조를 좌경적이라고 비난했다. 사친회는 또 교사들의 단식투쟁에 학생들이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학생등교 저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9월 29일에는 대구시내 중·고교생 1,400여 명이 “스승없는 학생없다”며 4·19 이후 최대의 학생데모를 벌였다. 사회 각계의 반대에 부딛친 국회는 9월 29일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폐기했다. 정부도 그간 준비해온 ‘교직단체법안시안’을 폐기했다. 오천석 문교부장관은 10월 18일 “조직은 허용하되 쟁의권은 부여할 수 없다”고 발표했으나, 이미 교원노조가 노동3권은 보장하되 단체행동권에서 쟁의권은 유보할 수 있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 장관의 담화는 체면유지용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결국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한 교원노조는 1960년말부터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주요한 활동양상은 다음과 같다. ①학원정화운동(3·15부정선거와 각종 비리에 관련된 교직자 추방운동, 교과서 부정공급 반대. 어용 교련 반대 등) ②법정수당 쟁취투쟁(1960년 11월부터) ③2대악법 반대투쟁(노조, 혁신정당, 학생단체와 연대하여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의 입법 저지투쟁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개입, 1961년 4월 2일 이른바 ‘대구폭동’을 경북교원노조가 주도) ④1961년 5월 4일 「민족통일학생연맹」이 발표한 ‘민족통일을 위한 남북학생회담’을 비공식적으로나마 지지하면서 통일운동에 참여할 욕구를 표명했다. (3) 해체. 교원노조는 다른 진보적 운동단체들과 마찬가지로 5·16 군사쿠데타의 강력한 탄압을 받고 해체되었다. 쿠데타 직후 전국에서 간부와 노조원 1,5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노조간부 8명이 ‘교원노조사건’으로 기소되어 이중 6명이 징역 15년에서 3년까지를 선고받았다. 경북교조위원장은 ‘대구 데모사건’으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용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반국가 특수행위’죄를 적용받았다. 교원노조간부들 51명은 제3공화국에서도 「정치정화법」의 규제를 받았고, 실형을 마친 사람들은 유신 이후 「사회안전법」의 처리대상으로 규제되어 교원노조운동이 끝난 후 30년 가까이 사회의 공식지위에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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