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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Gorbachev, Mikhail Sergeyvich (1931~ ))

남부 러시아에 있는 프리볼노우 마을에서 1931년에 태어나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후 공산주의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으며 1970년에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최고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8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다. 브레즈네프 Brezhnev, L. I. 사후 안드로포프 Androv, Y. V.의 등장과 함께 그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체르넨코Chernenko, K. U. 등장 이후에는 중앙위원회에서 경제, 이데올로기, 문화, 세계공산주의 문제 등을 맡음으로써 2서기자리를 굳혔다. 19853월 체르넨코 사망 이래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서기장과 소비에트연방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서기장 취임 이후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라는 이름 아래 2의 혁명을 꾸준히 수행해왔다. ‘레닌적 공존노선으로의 회귀를 천명하면서 새로운 국제관계를 강조한 것은 침체된 사회주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핵시대라는 인류의 공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권의 군사 강경노선으로 인한 재정적자의 천문학적인 누증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내적인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주의적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내정책으로서 공개성’(글라스노스트glasnost)민주화를 확대하기 위해서 언론개방과 복수후보 비밀투표제를 실시하였다. 이는 기업의 독립채산제와 시장의 자율성 확대 등의 경제적 조치와 더불어 기존의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베오그라드 선언을 통해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였다. 이는 소련이 다른 사회주의국가를 지도해야 한다는 제한주권론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발전의 다양성을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 군비축소회담의 주도, ·소 정상회담의 개최 등으로 구체화되어 현존하는 신데탕트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개혁노선이 나오게 된 소련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보면 흐루시초프 Khrshchev, K. S.에 의해서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지령주의가 어느 정도 극복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시대 이후 국가 계획경제의 폐해 및 관료주의의 심화로 인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는 자기진단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고르바초프는 지도원칙으로서 정보공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적 경쟁의 원칙을 들고 있다. 동시에 그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당과 정부의 정확한 지도노선과 기층민중의 제반 민주적 권리 획득이 결합하는 위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이러한 혁명의 과정은 소비에트 체제가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위치한 과도기 단계로 파악하였다. 이런 점에서 고르바초프는 권력구조의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절차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군축 등을 통해 세계평화의 흐름을 주도해나갔다. 인도공산당, 일본공산당을 비롯한 적지 않은 공산당의 입장에서 나타나듯 이 고르바초프의 평화공존론이 계급투쟁과 세계혁명을 전제함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에 대한 지나친 공존론적 사고와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의 지원이라는 면에서 그 유약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새로운 사고, 페레스트로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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