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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력 직인] (Wanderschaft der Handwerker)

중세부터 전해지는 직인이 되기 위해 각지를 전전하며 떠돌아다니는 도제수업 직인을 가리킨다. 사회주의 운동,공산주의 운동은 이 직인들의 편력 코스와 미묘하게 일치한다. 취리히, 바젤, 베른, 리옹, 파리와 같은 도시는 직인들의 편력 코스였다. 직인들은 그러한 도시를 편력하는 동시에 각 도시에서 최신 사상을 받아들여 각지로 확산시켰다.

독일에서도 이미 프랑스 혁명의 영향 속에서 동업자조합(Zunft)은 소멸해 갔지만 직인의 편력제도는 남아 있었다. 직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각 동업자조합에 등록하고 거기서 3년 이상 도제생활을 해야만 했다. 나아가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의 수련이 필요했다. 직인은 '편력증(Wanderbuch)'이나 여권을 지니고서 미리 결정된 외국의 직인 숙사(Herberge)에 숙박하고, 거기서 새로운 장인을 찾아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이것이 편력이라는 제도다.

1830년대의 독일인 직인이 편력하는 나라는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였다. 편력 직인의 필수품은 배낭과 최소한의 의류, 속옷이었고 무기 휴대는 엄격히 규제되고 있었다. 여행은 거의 도보이고, 이동 계절은 직종에 따라 달랐지만 3월부터 5월이 많았다. 이는 기후 문제라기보다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의 문제였다. 직인들은 그 지역의 경찰에게 편력증을 건네고 거기서 비자를 받아야만 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감시는 19세기 중반부터 엄격해지고 있었지만 원래는 그리 엄격한 것이 아니었다. 직인 숙사에서는 그곳의 주인이 경찰 대신 관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도시의 외국인 직인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당국 자신도 충분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직인들의 비밀결사를 쉽게 조직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인 편력 직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던 곳은 파리였다. 개개의 직인 자체는 매년 교체되고 있었지만 직인 전체의 숫자는 변하지 않고 수만 명이 언제나 파리에 살고 있었다. 파리의 가구 직인의 1/5, 재봉 직인의 2/5, 가죽 직인의 1/3이 독일인으로 이루어진 형편이었다. 독일인 직인들이 추방자동맹이나 의인동맹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직인들은 세느 강 우안의 생 앙트완느, 생 트노레, 비비엔느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지역은 독일인 콜로니가 형성되고 독일인들을 위한 레스토랑, 호텔, 술집이 들어서서 독일인 지식인들이나 혁명가들도 그곳에 활동의 거점을 두고 있었다.

『포어베르츠』1나 『독일인의 물길 안내인』(Deutsche Steuermann, 1844-46)과 같은 신문사 사옥도 이 지역에 있었다.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 합창협회, 독서 클럽출판사, 인쇄업자와 같은 조직도 그러한 콜로니 안에서 형성되어 갔다. 편력 직인의 콜로니는 파리에 사는 독일인 전체의 가장 활동적인 부분이었던 것이다.

-마토바 아키히로()

[네이버 지식백과] 편력 직인 [遍歷職人, Wanderschaft der Handwerker]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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