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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 ()

1848년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 파급되어간 유럽 동시혁명. 혁명의 내용은 각각의 지역에 따라 달랐지만 그 이념은 유럽의 민주화였다. 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이유는 1847년의 경제공황과 각 나라가 안고 있던 문제가 공통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교통 · 통신의 발달로 뉴스가 그날 안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망명자들이 수일 내에 귀국할 수 있었다는 상황, 망명자들이 이웃 나라들로부터 급진적 사상을 본국으로 보내 본국 사람들과 밀접한 연락을 서로 취하고 있었다는 것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Ⅰ】 혁명의 연쇄

나폴레옹 체제 붕괴 후의 유럽은 빈 체제에 의해 왕정이 부활해 보수화되었지만 나폴레옹이 가져다준 자유는 각지에 독립운동을 불러일으켰다. 부활한 왕정도 헌법이나 출판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어렵게 되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민주주의 운동에 대해 당국은 탄압을 반복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웃 나라들, 예를 들면 프랑스나 스위스로 망명함으로써 그 에너지를 온존시키고 있었다. 1830년에 스위스에서 시작되는 청년 유럽운동은 청년 이탈리아, 청년 독일, 청년 폴란드 등의 형태로 각 지역의 혁명가들을 모아갔다. 그들은 스위스에서 탄압된 후에도 프랑스, 영국, 미국으로 망명지를 옮겨가면서 혁명의 도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혁명의 소식이 파리에서 들려오자 각국에 있던 망명자들은 귀국을 결심한다. 맑스는 브뤼셀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의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던 중에 파리에서 혁명의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로 향한다. 망명지로부터 파리에 모인 망명자들은 거기서 각 지역에 혁명을 유포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러던 중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혁명 소식이 전해진다. 독일인들은 헤커의 혁명군에 합류해 무장투쟁을 하려고 하는 독일인 민주협회 그룹과 합법적인 조직과 선거에 대한 참가를 추진하는 노동자 그룹으로 나뉜다. 맑스는 후자 그룹에 참여해 쾰른으로 돌아가 공산주의자동맹 조직의 확충과 기존의 민주주의협회를 통한 선거운동을 전개한다. 그 중심에 『신라인 신문』이 있었다.

【Ⅱ】 혁명의 패배

원래 국제적 연대라는 형태로 시작된 혁명운동도 혁명이 진전되는 가운데 국가들의 대립으로 나아갔다. 폴란드를 둘러싸고 독일도 프랑스도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폴란드 혁명군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일치했지만, 현실적으로는 프랑스 군이 독일을 통과하는 것에 독일인들은 반대했다. 또한 국내에서의 혁명운동도 민주파와 노동자의 분리, 국왕의 교묘한 공작, 민족주의의 대두, 보수파의 반격 등에 의해 프랑스와 독일에서 모두 혁명 후 수개월 만에 상황은 진정되어 간다. 이리하여 혁명정권이 보수파의 반격으로 힘을 잃어감에 따라 혁명가들은 다시금 망명하게 된다.

혁명 최후의 보루인 바덴 봉기도 패배로 끝나면서 혁명의 움직임은 거의 소멸한다. 수천 명의 망명자들을 받아들인 프랑스나 스위스도 혁명의 위기와 불온함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망명자들을 벽지로 몰아넣든가 미국으로의 추방을 획책했다. 이리하여 혁명은 실패하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망명자들이 영국과 미국으로 몰려든다. 맑스나 엥겔스의 런던으로의 망명도 그런 흐름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Ⅲ】 혁명의 결과들

혁명 후의 유럽에서는 다시 보수적 정권이 탄생한다. 맑스는 1848년 혁명의 실패를 되돌아보고 민주파가 노동자를 배신한 것을 지적하지만, 맑스 자신이 독일과 같은 지역에서는 민주파와의 공조가 없으면 노동자만으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의회에서의 민주파의 승리와 보통선거의 실시, 그 후의 노동자에 의한 민주파의 정화. 이러한 도식이 맑스에게 있었지만, 실제로는 쾰른에서도 민주파는 잇따른 프로이센 정부의 공격으로 위축하게 되었고 국왕에게 접근해 갔던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1848년 혁명의 실패 결과로 다음에 일어날 혁명은 연쇄적인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혁명이 아니라 경제공황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혁명일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맑스의 경제학에 대한 본격적인 몰두는 바로 이러한 혁명론의 변화에 나타나 있다.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공황에 이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은 공황이 확실한 것처럼 확실하다"[7:450]라는 확신을 지닌 발언이 그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맑스의 이런 시각은 단기적으로는 틀린 것이었다. 첫째로, 공황이 맑스가 예측한 대로는 혁명을 불러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혁명가들이 당장이라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가운데, 공황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생각은 맑스파를 약체화시키고 망명자들 사이에 분열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얄궂게도 맑스의 분석은 순환공황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혁명을 설명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맑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혁명에 질린 보수파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혁명가들을 잡아들였고 혁명의 원인이었던 빈곤문제도 표면적으로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스템의 도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결국 1848년과 같은 동시혁명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마토바 아키히로()

[네이버 지식백과] 1848년 혁명 [一八四八年革命, 1848 Revolution; Revolution 1848/1849]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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