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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동맹] (der Bund der Gerechten)

의인동맹(사료에 따라서는 '독일정의동맹(der deutsche Bund der Gerechtigkeit)', '정의자동맹'이라는 역어도 있다)은 급진적 공화주의 결사인 '추방자동맹'(혹은 '망명자동맹')으로부터 1837년 무렵에 분리되어 결성된 최초의 독일인 공산주의 결사. '공산주의자동맹'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Ⅰ】 동맹의 결성과 전개

1834년에 결성된 추방자동맹은 파리 거주 독일인 망명자와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로, 사형을 포함한 엄격한 규율을 갖고 있었다. 의인동맹에는 선거에 의한 지도부 선출 등 민주화된 측면도 있으나 비밀결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으며, 가입할 때 의무적으로 하는 '선서'에는 비밀 준수 의무를 깨뜨릴 경우 "명예박탈과 죽음을 달게 받아들인다"라고 하는 추방자동맹 규약(상급규약)과 동일한 문구도 남겨졌다('죽음'은 복자()). 의인동맹 결성 직후에 만들어진 이 규약은 "굴욕적 억압의 굴레로부터 독일의 해방, 노예상태로부터 인류의 해방에 대한 협력,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안에 포함되는 원리들의 실현"을 '동맹의 목적'으로 하는 등, 추방자동맹의 공화주의적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38년에는 공산주의적 지향을 명확히 하는 강령을 목표로 하여 샤퍼가 「재산공동체」라는 제목의 초안(미완)을, 바이틀링이 『인류, 그 현실과 이상』을 집필하고, 후자가 동맹 강령으로 채택되어 익명의 소책자로 간행되었다(38년 말경).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고 현존 사회의 전면적인 부정 위에 도입되어야 할 사회는 '재산공동체(Gütergemeinschaft)'라 불렸는데, 이것은 당시 공산주의자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지향하는 자가 공산주의자라고 불렸다.

동맹의 조직적 중심은 파리에 있었다. 1839년 5월의 블랑키, 바르베스 등 '계절협회'에 의한 파리의 무장봉기에 동맹이 직접 관여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봉기가 일어난 날 밤에 샤퍼가 체포되고. 탄압은 동맹에도 파급되었다. 주요 간부는 파리로부터 흩어져 40년 이후 샤퍼는 런던에서, 바이틀링은 스위스에서 새로운 활동을 전개한다. 중앙본부(정식으로는 '인민회당')는 계속해서 파리에 있었지만, 지도는 신참인 에버베크가 맡았다. 샤퍼와 에버베크는 계절협회 봉기 패배의 교훈에서 노동자의 장기적 교육과 계몽을 새로운 노선의 기조로 하며, 규약의 엄격한 운용도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바이틀링도 당면해서는 계몽적 선전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폭동‒무장봉기 노선은 단념하지 않으며, 1843년에는 '도탈()'이론을 주창하고 사회적 혼란의 야기를 계획, 5월에 스위스 경찰에 체포된다. 다수의 문서도 압수되어(이를 관헌이 편집해서 출판한 것이 블룬칠리의 『바이틀링에게서 압수한 자료에 의한 스위스의 공산주의자』) 동맹은 또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이를 계기로 바이틀링파(스위스와 파리 소수파)와 반()바이틀링파(런던과 파리 다수파)의 내부 대립이 심화된다. 

45년 2월~46년 1월의 런던에서 열린 연속 토론에서는 바이틀링과 샤퍼가 직접 논쟁을 벌여 대립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바이틀링은 재산공동체의 폭력적 도입노선을 고집하고 바뵈프파적인 절대적 평등주의 논조를 강화하며, 샤퍼파는 대중적 계몽과 '인격적 자유'를 대치시켰다. 이미 파리에서는 에버베크와 그륀이 포이어바흐의 인간주의에 기초하는 '철학적 공산주의'로 반바이틀링파를 조직하고 있었다. 샤퍼파도 포이어바흐 철학에서 새로운 전망을 찾아간다.

【Ⅱ】 동맹의 재편과 맑스 · 엥겔스

맑스와 엥겔스는 1846년 2월 무렵 '브뤼셀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를 결성하고 독자적인 실천 활동에 착수했다. 위원회에는 당초 런던에서 내쫒긴 꼴인 바이틀링도 참가했으나 곧바로 맑스와 논쟁을 일으켜 결별한다. 위원회는 의인동맹 내 분파투쟁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고, 7월에는 샤퍼 등이 '런던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라는 형태로 맑스파와 제휴한다. 8월에는 에버베크의 협력으로 엥겔스가 파리에 도착하여 그륀파 멤버의 조직화를 시작한다. 위원회로서의 활동 그 자체는 확고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맑스파는 다른 한편으로 벨기에의 민주주의자와 함께 투쟁하면서 공산주의자의 조직화를 시도하며, 이는 일정한 진척을 보았다. 또한 독일 국내에서도 작게나마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의인동맹 쪽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파리는 조직의 혼란과 침체로 더 이상 동맹의 지도부일 수 없게 되어 10~11월 무렵에 중앙본부가 런던으로 이전했다. 새로운 중앙본부=샤퍼파는 반바이틀링파의 결집에 의한 동맹 재건을 목표로 하여 11월에 「동맹원을 향한 호소」를 내놓고 동맹대회의 개최를 제기했다. 그러나 바이틀링파의 끈질긴 저항, 그륀파와 그 밖의 중간파의 무관심으로 인해 소기의 응답을 얻을 수 없었으며, 나아가 12월에는 베를린 지구 멤버의 일제 체포와 간부의 전면적인 자백이라는 사태가 일어나 계획은 일찍부터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다. 

그리하여 중앙본부는 47년 1월, 맑스파에게 동맹에 대한 가맹을 요청하게 된다. 맑스 등의 가맹 직후에 나온 중앙본부의 「동맹원을 향한 호소」(2월)는 공산주의를 사회주의와 명확히 구별하여 전자야말로 동맹의 입장임을 역설하고 새로운 강령의 작성, 공적 기관지의 발행 등의 방침을 제기했다.

동맹대회는 47년 6월에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서 동맹은 명칭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변경하고 새로운 규약과 강령 초안인 「공산주의의 신조 표명」을 채택했다. 의인동맹의 최초이자 최후의 이 대회가 공산주의자동맹의 제1회 대회가 된다. 여기서 채택된 규약 · 강령 초안이 모두 잠정적인 것이라고 하여 제2회 대회(11월 말~12월)로써 공산주의자동맹이 정식으로 출발했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규약은 제1회 대회의 정식 결정사항이며 대회 후의 절차도 이 「공산주의자동맹 규약」에 따라 진행되었기 때문에 의인동맹으로서의 활동은 공식적으로는 6월의 대회로써 종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의인동맹의 지부나 개별 반, 개개의 동맹원이 모두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이행한 것은 아니며, 활동을 정지한다든지 바이틀링파처럼 의인동맹의 정통을 자임하며 독자적으로 활동을 계속한 부분도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는 의인동맹과 공산주의자동맹은 한 시기에 병존했던 셈이다.

-고바야시 마사토()

[네이버 지식백과] 의인동맹 [義人同盟, der Bund der Gerechten]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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