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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혁명] (Märzrevolution )

【Ⅰ】 유럽혁명으로서의 3월 혁명

1848년 2월 22일부터 파리에서 시작된 프랑스 2월 혁명을 발화점으로 하여 독일어권 및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로 확산되는 민족적인 성격을 지닌 광범위한 반봉건적 혁명. 2월 27일 바덴 대공국 만하임에서의 대중집회를 필두로 남서독일에서 시작된 각 영방국가 정부에 대한 반대투쟁이 3월이 되어 독일연방의 주요 대국인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으로 확대되어 각국에서 민주화 요구가 일시적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 이래로 반혁명이 힘을 회복하고, 1849년 5월부터 7월에 바덴에서의 최후의 대규모 무력충돌에 따른 혁명군의 스위스 패주(7월 12일)와 라슈타트 요새의 함락(7월 23일)으로 인해 이 혁명은 최종적으로 패배로 끝난다. 이와 같이 3월 혁명이란 1848년 3월부터 시작되는 1년여의 반봉건운동이라고 한다면 1848/49년 혁명이라고 칭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혁명에 앞서 1830년대부터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한 협회조직이 각 도시에서 형성되어 혁명을 담당하게 되는 조직형성과 네트워크 구축의 훈련은 민중 측에서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32년의 팔츠 지방을 중심으로 한 '자유로운 출판을 지원하기 위한 독일조국협회'이며, 같은 해 이 조직이 중심이 되어 개최된 함바흐 축제이다. 1840년대에는 사회 각 계층별 내지 계층 횡단적인 조직체인 협회가 군생하고, 이 협회를 전 독일적인 운동의 조직 원리로 내세운 바덴의 오펜부르크 집회가 1848년 3월 19일에 열렸다. 

경제적으로는 1845년부터 46년에 걸친 농업의 심각한 부진으로 인해 1846/47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고, 여기에 47년에 영국에서 시작되는 경제공황이 더해져 이 해에는 독일 각지에서 식량폭동이 빈발한다. 이러한 민중운동 속에서 잔존하는 봉건적 제도들의 폐지, 독일 통일, 출판과 집회의 자유, 신분의회 개혁, 독일연방의 개혁 등, 이른바 '3월 요구'가 각지에서 표출되기에 이르지만, 이것 또한 이미 1830년대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Ⅱ】 혁명의 네 국면

1848/49년의 1년여의 혁명운동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국면의 추이를 보여준다. (1) 1848년 3월의 이른바 '3월 사건들'. 3월 13일의 빈에서의 민중 데모에 의한 메테르니히의 추방, 18일 베를린에서의 바리케이드 투쟁이 정점을 이루고, 이에 의해 3월 요구는 각 영방국가에서 커다란 저항 없이 받아들여져 각국에서 자유주의적인 내각('3월 내각')이 태어난다. 3월부터 4월에 걸쳐서는 전 독일에서 시민, 노동자의 협회조직이 설립되었다. (2) 민중의 에너지는 독일 통일을 지향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선거로 향하게 된다. 4월 1일부터의 준비의회로부터 전 독일의 본 선거를 거쳐 5월 18일 파울로 교회에서 본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의회의 존속 기간 중(1849년 6월 18일까지 13개월) 보결도 포함하는 의원 총수 800여 명 가운데 대학 졸업자는 600명을 넘어서며, 직업에서는 공무원이 400명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의회는 온건한 자유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사실 좌파 분파인 '도이처호프'와 '도너스베르크'를 합쳐도 온건파 분파인 '카지노'가 우세했다. (3)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종래의 영방국가 권력들과의 대결의 장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해지면서 혁명의 에너지는 9월 이후 각지로 분산되는 동시에 반혁명 측도 태세를 갖추어 혁명 진압에 나서게 된다. 

10월 28-31일 빈에서는 시민군과 황제군의 격렬한 공방으로 이 도시가 황제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또한 3월 이래 코슈트의 지도 아래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헝가리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1월 1일 프로이센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백작 내각이 성립하고, 봉건적 제도 폐지를 목표로 구세력과 대결자세를 강화하고 있던 프로이센 국민의회도 12월에는 강제적으로 해산 당했다. (4) 1848/49년 혁명의 최종 단계는 12월 21일의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 의한 '독일 국민의 기본권' 결의와, 1849년 3월 27일의 '독일국 헌법(Deutsche Reichsverfassung)' 가결에 의해 이들에 대한 승인을 각국 정부에 요구하는 운동으로서 전개되었다. 

특히 5월 3일부터 9일에 걸친 작센왕국 수도 드레스덴에서의 인민궐기, 바덴에서의 5월 12일 라슈타트 요새의 병사 반란, 다음 날 13일 오펜부르크에서의 대규모 집회에 의해 활발해졌다. 그러나 팔츠, 바덴 및 전국에서 온 의용병이 가세한 혁명군과 왕후군의 전투 끝에 7월 23일 라슈타트 요새의 함락으로 혁명은 패배로 끝난다. 이들의 진압에는 대부분 프로이센군이 지원을 위해 출병했다.

【Ⅲ】 3월 혁명의 역사적 의미

3월 혁명은 봉건적인 제도들을 타파하고자 하는 민중운동이었다. 시민 및 사회적 하층 민중은 무수한 협회조직을 형성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선거투쟁, 무장투쟁을 행했다. 그러나 구체제를 타도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 혁명은 '패배' 내지 '좌절'이었다. 혁명이 좌절된 원인으로는 운동의 지역적 분산, 혁명을 영도해야 할 시민계급의 온건파와 급진파로의 분열 등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1850년대의 반동시대에서도 비록 '위로부터'이긴 하나 산업화의 이륙을 보증하는 제도들의 개혁이 이를 계기로 주저 없이 계속 이루어져 1860년대 이후의 시민, 노동자의 새로운 조직화를 가능케 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 의한 헌법을 현대 독일 기본법의 원점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혁명은 독일에서의 근대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3월 혁명의 또 하나의 특징은 민족주의의 발흥이었다. 민족주의는 소국으로 분립되어 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독일 통일을 지향한 이 혁명에 기여했다. 그러나 1848년에 표면화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는 민중 역시 대외적으로 강력한 국가를 원했다. 이는 19세기 말 독일에서의 제국주의 시기의 자유주의자로 계승되는 특징이다.

-무라카미 슌스케()

[네이버 지식백과] 3월 혁명 [三月革命, Märzrevolution]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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