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우애회] (Arbeiterverbrüderung)
혁명의 해인 1848년 9월에 결성된 독일 최대의 노동자 조직(1850년 6월에 해산). 1850년 2월의 시점에서 구성원이 18,000~2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다만 '우애회'는 독일 각지의 노동자 조직의 느슨한 연합체에 지나지 않으며, 구성원 숫자의 크기가 그대로 조직 전체로서의 힘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추계에 따르면 혁명기의 노동자협회 335개 가운데 '우애회'에 참여한 것은 112개였다. 당초에 중심이 된 것은 북부 · 중부 독일의 노동자협회이며, 특히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노동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공산주의자동맹'의 독일에서의 거점이자 당시 최대의 노동자협회였던 쾰른 노동자협회는 '우애회'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다만 결국 수십 명의 멤버가 있었던 데 지나지 않고 게다가 내부대립을 반복하면서 해체되어 간 '동맹'에 비해 '우애회'의 영향력은 훨씬 컸다. 1848년 혁명 하의 독일의 노동자운동에 대해서는 통상적으로 사회보수적, 사회개량적, 사회혁명적이라는 세 가지 조류의 존재가 지적되는데, '우애회'는 이 가운데 사회개량적 조류를 대표하는 것으로 종종 이해되고 있다.
실제로 특히 1849년 후반기 이후-요컨대 혁명의 최종적 패배 이후-그 활동은 편력 원조나 질병 원조 등의 공제제도에 집중해 가게 되지만, 다만 '우애회'는 결성 당초부터 이러한 공제활동들과 더불어 단결권, 보통선거권, 나아가서는 상비군 폐지와 민중무장 등 활발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전개하고 있었다. 또한 '우애회'의 지도자 보른은 협동조합(아소치아치온)적 생산 · 유통의 전면화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극복을 지향하는 '아소치아치온 사회주의'라고도 말해야 할 사상을 창도하고 있다. '우애회' 운동의 성격은 혁명의 추이와 더불어 변화하며, 또한 각 지역에 따른 차이도 간과할 수 없다. 혁명기의 노동자운동 전반과 마찬가지로 '우애회' 그 자체도 복합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야마이 도시아키(山井敏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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