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책 처음으로 | 사전 | 자유게시판 | 회원자료 | 로그인

 
마르크스주의 | 인물 | 정치경제학 | 미학 | 철학 | 한국현대사회운동 | 한국사회주의운동가

       ■ 의견바로가기

[공산주의자동맹 共産主義者同盟 ] (der Bund der Kommunisten )

목차

  1. 【Ⅰ】 동맹의 결성과 『공산당 선언』
  2. 【Ⅱ】 1848년 혁명과 공산주의자동맹


의인동맹의 조직개편으로 1847년에 결성된 공산주의자의 비밀결사. 그 강령적 문서로서 출판된 것이 『공산당 선언』{『공산주의자 선언』}. 48/49년 혁명 당시에는 맑스가 편집하는 『신라인 신문』이 기관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동맹원들은 각지에서 혁명의 선두에 서서 싸웠다. 그러나 혁명 과정에서 점차 조직으로서의 통합성을 잃고, 50년에는 재건된 중앙위원회도 분열, 1851년의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과 동시에 해산했다.

【Ⅰ】 동맹의 결성과 『공산당 선언』

의인동맹 중앙본부에 의해 소집되어 47년 6월 런던에서 개최된 의인동맹 대회가 공산주의자동맹의 결성대회(제1회 대회)가 되었다. 대회는 동맹의 명칭을 변경하고 「공산주의자동맹 규약」(제1차 규약)을 채택했다. 의인동맹 규약에 있었던 동맹원의 '독일인' 조항이 철폐되고 동맹의 목적에서도 '독일의 해방'이라는 문구가 삭제되어 국적과 민족을 넘어선 단결이 추구되었다. 이는 의인동맹이 실제로 키워온 사항이 규약에 표현된 것이다. 

새로운 규약은 또한 조직이 민주적 규칙에 따라 운영되도록 각종 절차를 명확히 하고, '집행 권력으로서의 중앙위원회'와는 별도로 '입법기관'으로서 '대회'를 신설했다. 운영규칙은 민주화되었으나 동맹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비밀결사로서 동맹원은 비밀 준수 의무를 짊어졌다. 대회는 강령도 일신하여 샤퍼가 기초한 초안 「공산주의의 신조 표명」을 채택했다. 대회를 주도한 것은 런던의 의인동맹 지도부(샤퍼파)로 공산주의자동맹의 결성에 관한 한 맑스파는 최대의 협력자이긴 했으나 주역을 맡지는 않았다.

새로운 규약과 강령(초안)은 "대회의 입법결정은 모두 승인 또는 기각을 위해 각 반에 제기된다"는 새로운 규약 제21조에 입각하여 하부 토론에 맡겨졌다. 각종 이의나 개정 의견이 제출되어, 이들은 11월 말~2월 초 또 다시 런던에서 개최된 제2회 대회에서 토의되었다. 규약은 이 대회에서 대폭 개정되었다(제2차 규약). 동맹의 목적은 "재산공동체의 이론의 보급 및 가급적 신속한 실천적 도입에 의해 인간을 노예상태에서 해방하는 것"으로부터 전면적으로 변경되어 "부르주아지 지배의 타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계급대립에 기초한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폐기, 그리고 계급과 사적 소유가 없는 새로운 사회의 창설"이라고 명기되었다. 

제1차 규약의 목적 조항이 의인동맹의 도달점의 표현이었던 데 반해, 제2차 규약의 그것은 공산주의자동맹의 고유한 입장을 명시하고 있다. 조직운영 규약은 좀 더 치밀하게 명문화되어 이전보다 민주적인 것이 되었다. 다만 비밀결사라는 것은 계속해서 엄수되고 있다. 맑스파(브뤼셀 지구)는 동맹의 대중적 영향력 획득을 위해 동맹원이 다른 정치적 단체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할 것, 혁명 정세가 도래한 경우에 동맹의 행동력 · 기동력이 상실되지 않도록 조직운영의 민주적 절차에 일정한 제한을 둘 것을 제안하고, 이는 제2차 규약에 채택되었다. 강령 초안에 대해서는 엥겔스가 개정안 「공산주의의 원리」를 파리 지구의 안으로서 제출했지만 이것을 그대로 채택하게끔 할 의도는 없었고, 결국 대회에서는 신규 초안 작성이 맑스에게 위임되었다. 

이러한 대회 결정에 따라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적 문서로서 (동맹의 문서들과 토론에 기초하여) 집필된 것이『공산당 선언』이다. 동맹은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선언』은 동맹원이 지도하고 있던 계몽적 합법단체 '노동자교육협회'의 출판물로서 48년 2월에 발행되었다.

【Ⅱ】 1848년 혁명과 공산주의자동맹

『공산당 선언』을 인쇄하던 중에 프랑스 2월 혁명이 발발했다. 동맹은 이에 호응하여 대륙에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위원회를 런던에서 브뤼셀로, 이어서 파리로 이전했다. 파리에서의 잠정적인 지도는 맑스에게 전권 위임되었다. 파리에서는 바이틀링파도 가담하여 지구 조직을 재건했다. 거기에 독일 3월 혁명이 발발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곧바로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를 집필하여 중앙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전단지로 인쇄했다. 이것은 독일 국내로 돌아가는 동맹원들의 손으로 배포되었다. 4월에는 중앙위원회 멤버가 각각 국경을 넘어 쾰른으로 들어가 독일 국내의 조직화에 착수한다. 

하지만 동맹 조직들은 점차 혁명의 파도에 휩쓸려 각각의 동맹원과 중앙위원회의 연락망이 단절되어 있었다. 맑스는 6월에 쾰른에서 일간지 『신라인 신문』을 창간하여 각지의 동맹원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호소를 계속했다. 이 신문은 동맹의 지도적 멤버에 의해 편집되어 실질적으로 동맹 기관지의 역할을 담당했다. 혁명 과정에서 동맹원들은 각지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와 제휴하면서 노동자 단체에 지도적 영향을 끼치고, 바리케이드에서는 선두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반혁명의 공세로 『신라인 신문』은 49년 5월로 폐간되고, 중앙위원회는 국외로 피했다. 맑스는 49년 8월 말 내지 9월 초 무렵에 런던에서 중앙위원회를 재건하고, 50년 3월에 월간지 『신라인 신문 · 정치경제 평론』을 창간한다. 동맹은 다시 한 번 혁명적 고양이 머지않아 도래하리라는 전망 아래 차티스트 좌파와 런던에 있는 블랑키파 등과도 연대를 강화했다(4월에 '혁명적 공산주의자 만국협회'를 결성). 

이 시기에 맑스는 『신라인 신문 · 정치경제 평론』에서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을 제기했다[『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7:86]. 혁명이 퇴조한 후 동맹의 재건은 중앙위원회나 개개의 지구 단위로는 진행되긴 했으나 또다시 대회를 여는 데는 이르지 못하며, 50년 여름에는 중앙위원회 내부에 대립이 생겼다. 이른바 빌리히 · 샤퍼파는 혁명이 절박했음을 예측하고, 맑스파는 전반적 호황기를 맞이했다는 상황 분석 위에 당면해서는 혁명의 가능성이 멀어졌다고 판단, 장기적 전망에서의 재조직화를 도모하게 된다. 빌리히 · 샤퍼파는 중앙위원회에서는 소수파에 머물러 있었지만, 런던의 동맹 조직 전체에서는 압도적 다수파를 차지,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독자적으로 결성하여(이른바 '분리동맹') 맑스파의 쾰른 신중앙위원회에 의해 12월에 제명당했다. 이리하여 동맹은 분열했다.

쾰른의 동맹조직은 반년 후인 51년 5월에 동맹원이 일제 검거되었고, 압수된 문서에서 동맹의 존재도 드러났다. 10월에 대역죄로 기소된 피고 대부분이 다음 달에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혐의의 대상이 된 것은 분리동맹의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피고들은 무죄였기 때문에, 맑스는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의 진상』을 저술하여 재판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피고들을 변호했다(이 목적을 위해 논조는 대역죄 '음모'의 부정에 중점을 두었다). 이 탄압에서 쾰른의 중앙위원회는 괴멸했다. 재판 직후인 11월 17일, 동맹의 런던 지구도 맑스의 제안으로 해산했다. 분리동맹은 그 후에도 잔존했으나 53년에는 해체되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없어졌지만, 혁명과 그 전후를 포함한 동맹의 교훈은 64년에 결성된 '국제노동자협회'(이른바 제1인터내셔널)로 계승되어 간다.

-고바야시 마사토()

[네이버 지식백과] 공산주의자동맹 [共産主義者同盟, der Bund der Kommunisten]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 인접어

공산당
공산주의
공산주의(共産主義)
공산주의(사회) 共産主義(社會)
공산주의 통신위원회
공산주의자동맹 共産主義者同盟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공산주의자동맹 共産主義者同盟
공상적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空想的 社會主義)
공중위생公衆衛生

뒤로
■ 의견

 



HOME - 후원방법 안내 - CMS후원신청 - 취지문 - 사용 도움말 - 회원탈퇴하기

2002 노동자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만들기 모임
120-702 서울시 중구 정동 22-2 경향신문 별관 202호 44
laborsboo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