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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주의통일당 獨逸 社會主義統一黨] (독,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 SED)

I. 당의 성격과 조직.

독일민주공화국 DDR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정당으로 독일의 다른 정당(독일 민주농민당 DBD, 독일 자유민주당 LDPD, 독일 국민민주당 NDRD)과 노동조합, 그 밖의 사회적 대중조직을 하나의 국민전선에 결집시키고, 2차세계대전후 독일의 반파시즘 민주주의 변혁과 그 후의 사회주의 건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초하여 국내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입장을 일관되게 지켜왔고,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 공산당·노동자당과의 단결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 프롤레타리아운동,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연대에 특히 힘을 기울이고 있다.

. 당의 역사.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1946421~22일에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공산당과 독일 사회 민주당의 합동대회에서 창립되었다. 독일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은 히틀러 파시즘으로부터 독일 국민의 해방 그리고 파시즘·군국주의의 근절과 평화적 민주 독일의 재건을 위해 공동으로 투쟁해왔으며 그 속에서 이들 두 당은 과업 달성을 위해서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업장에 서서 통일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 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전 두 당 간의 대립이 히틀러 파시즘의 대두와 독재를 허용하였으며, 세계대전 발발의 길을 열고 말았던 쓰라린 경험을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심각한 반성 또한 두 당의 통일을 촉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것과는 달리 미국. 영국, 프랑스의 점령지역 (오늘날의 서독)에서는 점령군과 서독 우익 사회민주주의자의 방해에 부딪혀 두 당의 통일이 실현되지 못했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창립에 의해 독일의 노동자계급은 비로소 혁명적 통일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양당의 발의로 결성된, 반파시즘 민주주의 정당들의 정치동맹인 민주주의 블록'을 더욱 강고하게 만둘 수 있게 되었다. 합동대회는 그때까지의 독일과 세계 혁명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한 새로운 당 강령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원칙과 목표', 당 규약 독일 인민에 대한 선언을 채택하였다. 새로운 강령은 당면요구'로서 전범·파시스트의 추방, 독점자본의 배제, 대토지소유의 몰수, 민주적 농지개혁, 민주적 권리의 보장, 통일독일의 반파시즘 의회제 민주공화국의 수립 등과 같은 반파시즘 민주주의변혁을 제시하는 동시에 당의 목표'가 다른 근로자와 동맹한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 획득과 사회주의의 실현에 있음을 표명하였다. 합동대회 당시 당원 수는 총 130만 명이었고, 그 중 사회민주당원인 사람은 68만 명, 공산당원인 사람은 62만 명이었다. 당 의장에는 공산당에서 빌헬름 피크 Pieck, Wilhelm, 사회 민주당에서 오토 그로테볼 Grotewohl, Otto 이 선출되었다. 당의 지도부로서 간부회가 만들어졌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1946년 가을 자치제선거(당시에는 아직 점령하에 었었기 때문에 중앙 국가기관의 설립은 인정되지 않았다)에서 제1당이 되었다. 2차당대회(1947920~24)에서는 반파시즘 민주주의 체제의 강화, 특히 노동자계급과 근로자의 정치적 능동성을 높이기 위한 조처와 아울러, 서방측 제국주의의 분열정책에 대항하여 자신의 힘으로 보다 많이 생산하고, 보다 많이 계획하며, 보다 올바르게 분배하는' 민주주의적 경제재건 프로그램을 채택하였다. 1947년말에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발의로 동·서독의 모든 민주 세력에 의한 인민회의운동 Volkskongressbewegung이 조직되었다. 1948년 중반에 동독은 소련 점령군의 원조 하에 반파시즘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하였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국민경제 2개년계획(1949~1950)을 수립하였다. 19499월 서방 제국주의와 서독 반동세력은 독일을 동·서로 분열시키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의 세 점령지역을 하나로 묶어 독일연방공화국'을 세웠다. 동독 국민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같은 헤 107일 소련의 지원과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하에 독일민주공화국'을 창건 하였다. 대통령에는 피크, 수상에는 그로테볼이 선출 되었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당원은 국가기관의 주요직책을 차지하였다. 인민회의 운동은 독일민주공화국의 국민전선으로 발전 개편되었다. 3차당대회 (1950720~24)에서는 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서독의 재군비·독일분열 정책에 반대하여 세계평화 옹호를 위해 싸울 것을 선언하고, 독일 최초의 5개년계획(1951~1955)과 마르크스 레닌주의 당에 걸맞는 새로운 당 규약을 채택하였다. 이 당 규약에 따라 중앙위원회 서기장 직책이 만들어지게 되어 울브리히트가 선출되었다. 당 외장에는 피크와 그로테볼이 재선되었다. 1950~1952년에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에 의해 사회주의적 노동조직이 각 직장에서 만들어져 사회주의 경쟁이 대중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노동자계급은 5개년계획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수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국가 및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성장하였으며,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또한 마르크스 레닌주의 정당으로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제2차전국협의회(195279~12)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독일 사회주의의 기초를 계획적으로 건설하기 위한 지침과 사회주의 건설의 골간인 국가권력을 더한층 강화하며, 농업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데 대한 방침을 결정하였다. 1953617일에는 베를린에서 반혁명폭동이 일어났으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확고한 전투성과 통일된 힘써 이를 격퇴하였다. 그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로 민병조직인 전투대가 만들어졌다. 4차당대회(1954330~46)는 제15개년계획 초기 3년간의 결과를 토대로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연료·에너지 기초산업과 화학공업을 급속도로 발전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15개년계획은 노동자 계급과 농민, 그 밖의 근로자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 5차당대회(1958710~16)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사회주의 건설을 승리로 이끌고 그로써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를 완료할 것을 결의하였다. 농업의 집단화는 이 점에서 특히 중요하였는데 이 과제는 1960년 초경에는 해결되었다. 이로써 독일민주공화국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 하지만 서베를린과의 국경이 개방됨에 따라 서독 측의 경제교란책에 의해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민주공화국은 사회주의를 방위하기 위하여 1961813일 이른바 베롤린 장벽'을 쌓아 국경을 폐쇄하게 되었다. 6차당대회 (1963115~25)는 독일민주공화국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되었고 사회주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당 대회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나라들과의 긴밀한 협력하에 사회주의를 포괄적으로 건설한다고 하는 새로운 과제를 설정하였다. 이에 조응하여 경제면에서는 사회주의 경제법칙을 전면적으로 구현한 새로운 국민경제의 계획화와 관리제도틀 도입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이 대회에서 사회주의의 포괄적 건설을 중심과제로 규정하는 새로운 당 강령을 체택하였다. 새로운 정세에 발맞추어 당 규약도 개정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사 회주의의 포괄적 건설이라는 용어는 사회주의사회의 유기적 일체성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제7차당대회에서 사회적 유기체로서의 사회주의 형성'이라는 표현으로 바뀌게 되었다. 7차당대회 (1967417~22)는 효율적인 국민 경제구조의 형성, 최신 과학기술 성과의 신속한 활용, 국가·사회적 지도활동의 체계적인 개선 등을 중요과제로 결정하였다. 196846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립된 새로운 헌법에는 노동자계급과 그 당인 득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적 역할이 명문화되었다. 19기년 53일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제16회 중앙위원회에서는 울브러히트 Ulbricht가 중앙위원회 제1서기직을 사임하고 호네커 Honeoker, Erich가 그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8차당대회(1971615~19)에서는 선진 사회주의 건설의 전락 전술을 결정하였다. ’선진 사회주의사회의 형성'이라는 과제는 제6차당대희 이후 실천적으로는 이미 제기되어 왔지만, 소련공산당 제24차대회에서 선진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에 대한 이론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독일민주공화국에서도 이론적인 정립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대회는 사회주의적 생산의 빠른 발견속도, 효율성의 증대, 과학기술의 진보, 노동생산성의 향상에 기초하여 국민의 물질적·문화적 생활수준을 더욱 높이는 것을 선진 사회주의 건설의 주요과제로 설정하였다. 대회에서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이러한 방침에 의해서 경제정책과 국민복지 실현을 위한 사회정책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대회가 결정한 경제정책의 과제는 전례없이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 그러고 사회정책 프로그램도 계획대로 혹은 그것을 초과하여 달성되었다, 특히 사회정책의 핵심이었던 주택 건설은 1971~1975년의 5개년계획 기간중에 50만 호를 건설할 계획이었는데 무려 10만호 이상을 초과하는 실적을 거두었다. 8차당대회 이후의 시기는 독일민주공화국에서, 국내 정치면에서나 외교적인 면에서 가장 성과가 컸던 기간이었다. 9차당대회(1976518-22)에서는 제8차당대희 이후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당 강령과 1970년대 후 반의 국민 경제계획을 토의·결정하였다. 새로운 당 강령은 독일민주공화국이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 대 초반까지 10년 동안에 이룩한 성과와 긴장완화로 나아가고 있는 세계정세 변화를 근거로 하여, 독일민주공화국에서 선진 사회주의사회 건설을 추전하고,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를 향해 점차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기본 전제를 만들어내는 것을 앞으로의 목표'로 내걸었다. 이 강령의 두드러진 특징은 선진 사회주의 사회에 관한 구상을 명확히 했다는 점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변증범적 연관을 규정하였다는 점이다. 1960년대에는 공산주의로의 길은 선진 사회주의 사회 이후에 만들어진다고 보는 견해가 당의 지배적인 견해였는데, 오늘날에는 선진 사회주의사회의 형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견해로 수정되었다. 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된 호네커는 대회석상에서 앞으로 몇 년 내에 공산주의의 물질적, 기술적 토대의 창출을 현실적인 일정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 발전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대회는 1980년까지의 5개년계획 기간에 국민경제를 집약화함으로써 국민소득을 27~30%, 공업생산고를 34~36%, 곡물생산을 20% 증대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10차당대회(19814)에서는 과학기술 진보의 가속화, 보다 높은 국민소득을 위한 사회적 생산의 향상 등을 목표로 한 10대 경제과제가 제시되었다. 1980년대 전반기 동안에 동독 경제는 연 평균 4% 신장을 유지 하였고, 19851인당 국민소득은 1400달러 (IBRD, IMF 평가)에 달한다. 198910월 동독의 정처개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로 인하여 호네커는 서기장직을 사임하고, 후임에 에곤 크렌츠 Krenz, Egon가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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