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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공산당] (Rumanian Communist Party)

I. 루마니아공산당 성립 전사(前史). 1차세계대전의 결과 루마니아 통일국가가 성립되기 전까지, 루마니아 인의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루마니아 왕국 지역과 합병 지역들(트랜실바니아, 바나트 등)에서 서로 다른 운동조건과 조직관계하에 놓여 있었다. 1880년대 구 루마니아지역에서는 도브로제아누 게레아 Gherea,D.C.에 의해 사회주의자 그룹이 만들어졌고, 1893년에는 루마니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이 창립되었다. 그러나 그 후 자유주의적 개량주의파 - 그들은 관용파 geners로 불렸다 -와의 당내투쟁이 벌어지고 당 지도부의 다수를 차지하였던 관용과가 사회주의를 방기하는 데까지 이르자 1899년에 당은 해체되었다. 관용파는 바로 자유당에 합류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그 후에도 노동운동 등에서 활동을 계속하여 1910년에 당 재건대회를 열고, 당명도 바꿔 루마니아 사회민주당을 발족시켰다. 이 당은 새로운 지도부에 라코프스키 Rakovski, C.를 영업하고 발칸의 여러 당 과 협력하여 발칸 사회주의연방 수립의 슬로건을 내걸고, 특히 발칸 전쟁부터 제1차세계대전에 걸쳐서 반전운동을 위해 싸웠다. 구 오스트리아·형가리 이중 왕국에서는, 트랜실바니아의 헝가리 사회민주당과 브코비나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여러 루마니아인 지부가 만들어졌다. 루마니아 통일국가의 성립에 따라, 191811월에 루마니아의 이들 구 사회민주당의 합동이 이루어져 당명을 루마니아사회당 Partidul Socialist din Rommia으로 바꿨다. 객관적인 혁명적 정세에 힘입어 당 세력도 급속히 확장되어, 1920년에는 당원수도 10만에 달했지만, 합동의 결과 여러 가지 경향이 당내에 출현했다. 즉 좌파, 우파(개량주의자), 중앙파들 간의 대립이 생겼는데, 특히 코민테른에 가업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다.

Ⅱ. 코민테른과 루마니아공산당. 1920년 가을에 당은 6명의 대표를 모스크바에 파견해서 코민테른의 제 원칙에 찬성을 표시하면서도, 코민테른 지도부가 통일국가의 형성을 기본전제로 하는 루마니아사회당의 투쟁을 민족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던 것(소련측의 이러한 견해는 1935년까지 변하지 않았다)과 루마니아 당 지도부의 인선에 간섭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 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이러한 의견대립은 그 뒤 까지 계속되었다. 대표단의 귀국 후에도 당내 분쟁은 격화되었으며 결국 우파는 탈당하고, 중앙파는 중앙 위원회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리하여 좌파가 승리한 뒤 19215월에 부쿠레시티에서 당대회가 열려, 코민테른에 가맹할 것과 당명을 루마니아공산당으로 개칭할 것 등이 결의되었다. 그 후 자본주의의 일시적, 상대적 안정기에는 공산당이 지도하는 스트라이크 운동이 활발해지고 또한 잠시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노동조함의 조직적 통일도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루마니아공산당 제2차대회(192210)에서는 노동자의 권리요구투쟁, 농민문제, 소수민족문제 등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전술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24년 전반기에는 당내 외견대립이 나타났고, 특히 코민테른의 지령에 의해서, 분리의 자유까지도 보장하는 민족자결권의 슬로건이 기계적으로 루마니아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것을 구실로 하여 공산당을 비합법화하였다{19244). 당은 사상적, 조직적으로 혼란을 겪게 되었고, 재건을 위해 비인에서 열린 제3차당대회(1925)는 중앙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활동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25년에는 공산당의 제창으로 인권연맹 Ligadrepturilorolmului을 비롯한 합법적 단체를 결성하여 당의 이데 올로기와 강령을 선전하는 데 활용하려고 하였으나, 정부의 삼엄한 탄압조치로 저지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코민테른은 1928년에 하리코프에서 루마니아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협의회를 소집했다. 루마니아에서는 소수의 중앙위원밖에 출석할 수 없었고, 소련에 있는 루마니아공산당원이 다수 출석했다. 그런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이 협의회를 당대회로 변경할 것을 결정하고, 민족문제에 대한 루마니아공산당의 태도를 엄중히 비판했다. 이것 때문에 당내 분파활동은 더한층 심각해졌다. 1929~1932년의 일반적 공황기에는 국내 정치·경제적 모순의 심화, 노동자계급의 생활조건의 악화로 인해 특히 철도종업원, 석유노동자, 광산노동자의 운동은 고양기를 맞았고 노동조합의 재편성도 이루어졌다. 노동자의 투쟁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겼던 것은 1931년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5차당대회였다. 대회는 당의 국내활동 강화를 목표로 일련의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고, 노농정부 수립을 위해 노동자, 농민, 피억압 소수민족을 당의 지도하에 결집시키는 전략과 임무를 명확히 하였다. 하지만 농민과의 동맹에서는 중농층을 배제하고,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당을 사회파시스트 그룹으로 규정하였으며 또한 민족자결권의 문제에서도 종래의 방침이 답습되었다. 1934~1938년에는 루마니아 경제의 회복과 함께 자본집중·독점화의 경향이 강화되었으며, 공산당은 사회적·민족적 구성의 측면에서 한층 강고해져 노동운동의 중심지에는 약 300개의 세포조직이 존재했다. 이 시기에 특히 중요한 의의를 지녔던 것은 코민테른 제7차대회였다. 공산당은 1935년 이후 보다 광범한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민주적 자유 볼록⌟ ⌜반파시즘 전국위원회가⌟⌜소련 우호협회등의 조직을 만들어 각종 집회와 시위를 지도했다. 19382~19409(카를2세의 즉위로 시작된 왕제 독재기)에 공산당은 노동조합 해산을 강행했던 카를2세 정부의 반인민적 정책에 반대하면서도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정부의 대외적 중립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반인민적 정책을 부추기고 있던 파시스트 단체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1939년 이후 루마니아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독일에 대한 종속성을 심화시켜가면서부터는 독일 침략에 대항하는 반대운동을 당면 과제로 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1939년말과 1940년초에 루마니아공산당에게 지령을 보내, 독일에 대한 반대운동을 삼가하고 카를세 정부의 반인민적 정책이 영국·프랑스에 대한 접근책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선전할 것을 요구 했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한때 혼란이 생겼다. 19409~19448월에 걸친 군사파시스트 독재 시기에는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 대소전쟁 반대, 애국 세력의 결집 등이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공산당의 지도하에 군수공장외 사보타지, 군대수송의 방해, 군수품창고의 폭파와 위험한 조건 속에서 반전시위 등이 행해졌다. 애국세력의 결집과 동원을 위해서 노동 통일전선 Frontul Vnic Muncitoresc⌟ ⌜국민 민주 블록 Blocul National Democrat을 조직하고 이런 조직들을 기초로 해방을 위한 길을 닦았다.

 

Ⅲ. 사회주의 건설기. 19443월말에 구 루마니아 국경을 넘은 소련군이 수도로 접근해오고 있었으며, 823일에는 쿠데타(인민 무장봉기)가 일어나서 군사 파시스트 정권은 붕괴했다. 그러나 왕제는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고 국내의 정치항쟁은 계속 발생했다. 공산당은 그 해 10월에 사회민주당, 경민전선등과 함께 국민 민주전선 Frontul National Democrat을 결성하고 내각의 개조를 요구했다. 194536일에 경 민전선의 페트루 그로자 Groza, Petru를 수상으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정부가 성립되었고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공산당 전국협의회가 열려 경제재건의 방법을 토의했고, 게오르그 데지 Gheor ghiu-Dei, G.가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루마니아는 산업의 국유화가 지체되어 주요 공장, 은행, 운수기관이 국유화된 것은 19486 월부터이다. 19471230일에는 국왕이 망명하고 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혁명의 실현에 착수했던 당은 19482월에는 사회민주당과 합동하여 루마니아 노동자당을 창립했다(이 대 회는 뒤에 루마니아공산당 제6차대회로 불리게 된다). 또한 이 대회에서 초대 법무상 파토라샤누 Patrascanu, L.가 비판을 받고, 1954년에 처형되었다(뒤에 명예회복이 되었다). 또한 1951년부터 시작된 5개년계획이 중공업 편중으로 인한 장애를 발생시켰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고 소련 망명자였던 아나 Ana 등이 숙청되었다. 공업화정책에 관해서는 1953년 당중앙위원회 확대총회에서도 검토 시정되었듯이, 풍부한 국내자원을 밑거름으로 하는 의욕적인 공업화정책이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60년의 제8차당대회는 루마니아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가 확립되었음을 선언했다. 또한 이때부터 공공연히 벌어졌던 중소논쟁을 계기로 루마니아 자주독립 노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24월에는 농업협동화가 달성되어 공업과 농업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였음을 공표하게 되었고, 6월에는 국제 사회주의 분업에 관한 문제를 둘러 싸고 코메콘과 대립게 되어, ‘초국가기관의 건설'이라는 흐루시초프 안은 철회되었다. 1965년 제9차당대회에서 차우세스쿠 Ceausescu, N.가 당 제1서기에 선출되었다. 공산당은 데지 집권 기간에 경시되었던 민족적 가치를 다시 부각시키며, 중소논쟁 사이에서 자주권과 중립성을 지킬 것을 선언했다. 당명은 루마니아공산당으로 바뀌고, 대회에서 승인된 새 헌법에 의해 국명도 루마니아사회주의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루마니아의 자주외교 노선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1968년 체코사건 때는 소련의 군사개입을 강력히 비판했다. 1974년 제11차당대희에서 차우세스쿠는 당 서기장, 국가평의회 의장 그리고 공화국 대통령까지 겸임하고, 저개발국가들이 안고 있는 사회주의의 문제점에 주목하며 새로운 국제 경제질서 수립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이것이 루마니아 외교정책의 주요과제로 등장하여 이후 차우세스쿠는 비동맹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79년 제12차당대회, 1984년 제13차당대회에서는 차우세스쿠 일가에 의한 권력 독점·세습이 강화되었다. 루마니아는 코메콘,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일원이면서도 대소 자주독립 노선, 독자노선을 일관 되게 견지해오고 있다. 198911월 제14차당대회에서 차우세스쿠는 "당이 혁명의 책임을 포기할 수 없고 역사적인 과업을 다른 정치세력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선언하며 과학적 사회주의의 제원칙을 고수할 것임을 강조했으나, 12월에 일어난 시민봉기에 의해 처형되었다. 차우세스쿠는 여타 동유럽 국가들의 정치경제 개혁에 비관적 업장을 취해왔고 국내 정치에서도 지나친 권력 집중과 남용으로 비판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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