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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회주의혁명 - 10월] (Russian socialism Revolution - October 10th)

레닌 : 소비에트를 위해 권력을 쟁취하고 정치적 지배를 부르주아지의 손으로부터 빼앗아 이를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손에 넘긴 10월 혁명은 수도에서의 10월 24〜25일의 승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중 정치적으로 가장 적극적인 부분으로서의 전위 —— 의 제2회 전 러시아 대회는 볼셰비키당에 다수를 주어 그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혔다. 혁명은 이어서 11월과 12월 사이에 군대와 농민의 전 대중을 끌어 들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낡은 지도적 조직 (군대위원회・지방농민위원회・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의 중앙집행위원회・기타)의 교체와 개선에서 나타났다. 이들 낡은 조직은 혁명이 지나온 협조주의적인 시기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적이 아니었던 단계, 부르주아적이었던 단계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다 깊고 보다 넓은 인민대중의 압력에 의해 불가피하게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헌법제정의회에 관한 테제, 1917, 레닌전집 제26권, PP. 388〜390).
두 수도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부터 1년이 지나서, 이 혁명에 영향을 받고, 또한 이 혁명의 원조를 받아 농촌의 외진 시골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소비에트 권력과 볼셰비즘을 최후로 견고하게 하고 국내에는 볼셰비즘에 대항할 세력이 없다는 것을 최후로 증명한 것이다. 농민과 더불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한 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를 향해 최종적으로 이행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은 농촌을 분열시켜 농촌의 프롤레타리아와 반(半)프롤레타리아를 자기편으로 이끌고 부농과 부르주아지 —— 농촌 부르주아지를 포함한一에 대항하여 농촌의 프롤레타리아와 반(半)프롤레타리아를 단결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만약 두 수도와 대공업중심지의 볼셰비키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농에 대항하여 빈농을 자기들 주변에 통합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그때 에는 그것 때문에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데까지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이 증명되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농민은 여전히 ‘전체적인 것’이었으리라. 즉 농민은 부농⦁부자⦁부르주아지의 경제적⦁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지도하에 머물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덧붙여 말하지만 이것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을 실제로 끝까지 수행하였으며 세계프롤레타리아혁명을 앞당기기 위한 중대한 역할, 코뮨 이후 사회주의국가를 지향하는 두 번째 걸음으로서의 소비에트 국가를 창설한 것, 이 모두가 프롤레타리아트뿐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볼셰비키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농촌의 계급분화를 기다리지 않았다던가 계급분화를 준비하고 실행하지 않은 채 1917년 10월〜11월에 내란을 ‘포고’ 했다던가 농촌에 ‘사회주의 도입’을 ‘포고’ 했다면, 그리고 농민 일반과의 일시적인 블럭 (동맹)도 없었거나 중농에게 일련의 양보를 하지도 않고서 끝내려고 즉석에서 시도 했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블랑키주의 (Blanquisme, 극단적 폭력주의)적으로 왜곡시키고 말지 않았을까. 그리고 소수자가 자기의 의지를 다수자에게 밀어붙이는 기도가 되고 말았으리라. 그것은 전농민의 혁명이 아직 부르주아혁명으로, 후진국에서 일련의 과도적 단계가 없이 그것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교자 카우츠키, 1918, 레닌전집 제28권, pp. 324〜325).

스탈린 : 또 한 가지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1917년 9월, 케렌스키 밑에서였지만 민주주의 회의가 소집되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SR)이 새로운 기관을—— 즉 소비에트로부터 헌법제정의회로 이행하는 준비를 하게 될 예비회의를 만들었을 때, 그때 우리 페트로그라드의 중앙위원회는 민주주의 회의를 해산시키지 않고 소비에트를 공고하게 하는 길로 전진시켜 소비에트대회를 소집하고, 봉기를 시작하여 소비에트대회를 국가권력기관이라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 밖에서 지하활동을 하고 있던 레닌은 중앙회의에 동의하지 않고 이 악당(민주주의회의)을 즉각 해산시키고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써 보냈다.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회의의 2분의 1, 적어도 3분의 1은 전선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체포와 해산으로는 우리 일을 망쳐버리고 전선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골짜기나 동굴이나 패인 곳은 모두 우리 실제 활동가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위대하여 자기가 가는 길에 있는 동굴도 패인 곳도 골짜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어나라, 목표로 직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실제 활동가는 그 당시 그러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불리하며 이 장애물을 피하고 지나서 나중에 적극적으로 난국에 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레닌의 온갖 요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소비에트를 강화시키는 길로 계속 전진하여 1〇월 25일의 소비에트대회까지, 성공을 거둔 봉기까지 사태를 끌고 간 것이다. 레닌은 그 당시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눈웃음으로 보면서 그는 말했다. ‘그래, 자네들이 아마 옳았던 것 같군’ 이라고. (러시아공산당 모스크바위원회와 레닌탄생 50년 기념집회에서의 연설, 1920, 스탈린전집 제4권, pp. 349〜350).
10월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의 최종적 수행을 그 주요임무 중 하나로 하고 있었지만 10월 혁명 그 자체가 부르주아혁명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했다면 견고한 혁명이 되지 못할 뻔 했다. 그처럼 10월 혁명 없이는 부르주아혁명이 끝까지 완수되지 못했을 것이며 그리고 10월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을 끝까지 완수했기 때문에 이 혁명이 당연하게 전체 농민으로부터 공감을 받았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하여 부르주아혁명을 끝까지 달성한다는 것이 10월혁명 과정에서의 파생적인 현상이 아니라 10월 혁명의 본질 또는 그 기본적 목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자네의 경우 10월 혁명의 주요목적, 즉 부르주아지 권력의 타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 자본가의 수탈 등은 도대체 어 디로 갔단 말인가. (농민문제에 관한 당의 세 가지 기본적 슬로우건에 대하여〈얀스키의 편지에 대한 회답〉, 1927, 스탈린전집 제9권, pp. 234〜235).

트로츠키 : 어쨌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1917년에 혁명의 템포를 결정한 것이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농업 문제도 이것이 없었다면 수개월, 아니 1〜2년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호 속에서의 죽음이라는 문제가 이미 지연을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병사들은 ‘만약 내가 없어진다면 토지가 있어도 소용없다’고 말 했던 것이다. 1,200만 병사의 추진력이 혁명을 맹렬히 가속화시켰다. 전쟁이 없다면 1905년의 총연습이 있었다고 해도, 그리고 볼셰비키당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도 우리가 개입할 때까지 혁명의 서곡은 다시금 8개월 이상 아마 1년, 2년 아니 그 이상도 계속 되었을지 모른다. (스페인 혁명과 그것을 위협하는 위험, 1931, 트로츠키선집 제8권, p. 227).
2월혁명은 농업문제도 민족문제도 해결할 힘이 없다는 것을 실증했다. 민주주의적 목표를 향하여 투쟁하고 있던 러시아의 농민과 피압박민족은 10월혁명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의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가 서유럽의 선배들이 수행한 역사적 임무를 실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보다도 먼저 정권에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1905년에 볼셰비즘은 민주주의적 임무를 달성한 후에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위한 투쟁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민주주의적 임무가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복합적 성격이 거기서 머물지는 않았다.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획득은 자동적으로 ‘최저 강령’과 ‘최고 강령’간의 경계선을 제거해 버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하에서는——오로지 그 밑에서만 !——유럽 노동자가 아직 우리에게 ‘방법’을 가르치는데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문제의 사회주의적 문제에로의 성장이행은 불가피 한 것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사 제6권 부록, 일국사회주의론,  1932, P. 201).

김일성 : 러시아의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은 우리나라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보급되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봉건적 압박과 일제의 강점을 반대하여 싸우던 우리 인민은 10월 혁명의 승리에서 커다란 충격과 고무를 받았으며 비로소 올바른 투쟁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벌써 1918년부터 우리나라의 선진적 애국투사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급하는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을 마르크스・레닌주의 기치 밑에 새롭게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의 탄압이 심한데다가 노동계급이 매우 어렸던 관계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널리 보급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민의 해방투쟁은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0월 혁명의 영향 밑에 1919년에 일어난 전 민족적 3.1봉기는 조선 인민의 애국적 투지와 혁명적 정력을 시위하고 일제 강점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반면에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제한성과 약점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놓았습니다. 3.1봉기의 실패는 조선의 혁명가들과 애국적 인민들에게 심각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3.1운동이 있은 뒤 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은 점차 노동계급을 선두로 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 기치 밑에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계급이 자라나 투쟁무대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국내의 여러 지방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소조들이 조직되어 활동하게 되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의 영향은 대중 속에 빨리 퍼져갔습니다. 수많은 노동단체・농민단체・청소년 단체들이 나오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비롯한 군중적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보급되고 노동운동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습니다. 공산당의 창건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을 추동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밑에 6.10만세 시위투쟁이 벌어진 것을 비롯하여 일제와 지주・자본가들을 반대하는 노동자・농민들의 대중적 투쟁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조선노동당 창건 스무돌에 즈음하여, 1965, 김일성저작선집 제4권, pp. 28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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