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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봉기・군사문제] (armed rising ㆍmilitary problem)


엥겔스 : 그런데 반란은 전쟁 기타와 아주 똑같이 하나의 기술 (Kunst) 로서 일정한 행동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이들 법칙을 무시할 때는 그것을 무시한 측에서 파멸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이들 법칙은 그때그때의 당사자의 성격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으로서 매우 명료하고도 단순하므로 1848년의 짧은 경험을 통해서조차 독일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것을 습득하고 또 이에 숙달됐을 정도이다. 첫째로, 제군(諸君)이 수행한 승부내기의 결과에 대하여 성과여하를 불문하고 태연자약하게 받아들일 만큼의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로 반란을 장난삼아 가지고 희롱해서는 안 된다. 반란은 날이면 날마다 그의 수치가 변화하는 것으로서, 대단히 부정(不定)한 변수(變數)를 가지고 행하는 계산과 비슷한 것이다. 제군과 대치하고 있는 군대는 조직ㆍ규율ㆍ관습적인 권위 등에서 여러분보다 우월하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적에 대하여 많은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패배하고 파멸할 것이다. 둘째로, 일단 반란의 길에 들어섰다면, 최대의 결심을 가지고 행동하되, 공세를 취해야 한다. 수세는 모든 무장봉기에서 죽음을 의미한다. 그때는 적과 아직 한판 싸움을 벌이기도 전에 그 봉기는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적의 세력이 분산되어 있는 동안에 적을 불의 공격하라. 설사 그 승리가 제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날마다 새로운 승리를 준비하라. 봉기의 최초승리로써 쟁취한 정신적 우월성을 확실히 유지하라. 이렇게 해서 언제나 가장 강한 충격에 따라 항상 안전한 편을 찾아 헤매는 저 동요하는 분자들을 우리 편에 끌어당기도록 하라. 적이 우리 편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키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적으로 하여금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라. 오늘날까지 세상에 알려진 최대의 혁명적 정책수립의 대가인 당통(Georges Jacques Dan ton, I759〜94)의 말을 빌린다면 ‘대담하라, 대담하라, 그리고 대담하라 ! ’ (de r audance, de 1’audace, encore de Paudace ! ) 이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1852, MㆍE선집 제4권, p. 148).
우리는 다음의 문제에 대하여 환상을 갖지 말도록 하자. 즉, 봉기가 시가전에서 군대에 대해 참된 승리를 거둔다는 것, 양대 적대군대간의 전투에서와 같은 승리를 얻는 다는 것은 대단히 드물다. 반란자로서도 그런 것을 목표로 했던 일은 역시 드물었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영향으로, 즉 양대 교전국 군대간의 전투에서는 전연 작용하지 않거나, 또는 훨씬 미약하게 밖에 작용하지 않는 그런 정신적 영향으로써 군대를 취약화시켜야 한다. 이것에 성공하면 군대가 말을 듣지 않게 되거나, 또는 지휘관이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잃으므로 봉기는 승리한다. 이에 성공하지 못하면, 군대측이 소수일 경우에조차, 보다 우수한 장비ㆍ전투력의 계획적 사용ㆍ군기라는 점에서의 우월성이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반란자, 이때 우리의 반란자가 참된 전술적 행동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하나하나의 바리케이드를 격식대로 구축하여 방어하는 일뿐으로 된다. 상호간의 지원, 예비 병력의 편성 내지는 운용, 다시 말하여 도시전체의 방어는 물론, 이미 한 구역의 방어조차 개개 부대 간의 필요불가결한 협력이나 종합운용도 매우 불충분하거나, 또는 많은 경우에 전연 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전투부대를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에 집결시키는 따위는 당연히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극적인 방어가 주요한 전투형태이고, 공격은 가끔 예외적으로, 어떤 기회에는 전진과 측면습격 따위를 급히 강행할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 점령하는 것은 통상 퇴각하는 정규군이 포기한 그런 곳에 한정될 것이다. 게다가 군대측은 대포와 기타로 완전무장했고 또 훈련된 공병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데 반하여, 반란자측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와 같은 전투무기를 전연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최대의 용감성과 강인성을 발휘하여 싸운 바리케이드전에서도-------예컨대 1848년 6월의 파리, 1848년 10월의 빈, 1849년 5월의 드레스덴 등에서 조차——공격군의 지휘관은 정치적인 고려에 방해받지 않고 순군사적인 관점에서만 행동했으며, 더우기 부하병사들을 신뢰할 수 있는 경우, 봉기 측의 패배로서 종결짓게 했다는 것은 이상 할 아무것도 없다. 1848년까지 반란자 측의 대부분의 승리는 매우 각이한 원인에 의한 것이었다. 1830년 7월과 1848년 2월 파리에서도, 또 스페인시의 대부분의 시가전에서도 반란자와 군대사이에는 시민군이 있었으나, 그들은 직접 폭동측에 가담했거나 아니면 미적지근한, 불확실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우리편과 마찬가지로 군대측까지 동요시켰는데 때로는 폭동 측에 무기까지 공급했던 것이다. 1848년 6월의 파리폭동처럼 이 시민군이 처음부터 폭동에 반대한 곳에서는 폭동이 실패하였다. 1848년의 베를린 폭동에서는, 하나는 3월 18일 밤부터 3월 19일 아침에 걸쳐 새로운 부대가 크게 증원됐기 때문에, 또 한 가지는 군대가 피로했고 보급이 나빴기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의 또 한 가지는, 군대의 지휘계통이 마비됐기 때문에 시민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경우에도 군대가 명령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던가, 사령관들이 결단력을 잃었던가, 또는 그들이 생각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시가전의 고전적인 시대에서 조차, 바리케이드는 그의 물질적 효력보다도 정신적 효력 쪽이 중요시되었다. 바리케이드는 군대의 견고성을 뒤흔드는 수단 이었다. 이것이 성공을 거둘 때까지 바리케이드를 확보한 경우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패배하였다. 우리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장래 시가전의 기회에 대하여 연구할 경우에는 이것이 착안해야할 요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1849년이 되자 성공의 기회는 이미 상당히 멀 어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이르는 곳마다에서 정부측에 가담하였고, ‘교양과 소유’는 폭동진압에 출동한 군대를 환영하며 그들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바리케이드는 그의 마력을 잃고 있었다. 병사들은 바리케이드 뒷쪽에서 이미 ‘인민’을 볼 수 없었고, 다만 반란자ㆍ선동자ㆍ약탈자ㆍ재산분할자ㆍ사회의 쓰레기만을 보았다. 그리고 장교들은 점차 시가전의 전술대형에 정통하게 되었으므로 이미 속성흉벽(速成胸壁)을 향하여 엄호사격도 없이 곧바로 돌격하는 따위의 위험한 전법을 쓰지않고, 정원이나 안뜰 또는 가옥을 통과 하여 바리케이트로 우회 접근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조금만 교묘하게 행하면 10 중 8, 9까지는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후에는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들은 모두가 군대에게 유리한 변화였다. 대도시는 심히 크게 확장되었고, 군대는 그 이상으로 비대해졌다. 파리와 베를린은 1848년 이래 4배 크기로까지는 확대되지 않았지만, 그의 위수병력은 4배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위수병력은 철도수송으로 24시간 내에 2배 이상으로 증강할 수 있게 되고, 48시간 내에는 거대한 무력으로 팽창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터무니없이 증강된 군대의 무장이 반란 측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해진 것이다. 1848년에는 활강전장(滑腔前裝)단발총을 사용 했지만 오늘날에는 소구경 후장(後裝)연발총을 사용하고 있는데 후자는 전자에 비하여 4배의 사정거리와 10배의 정확성 그리고 10배의 발사속도를 가진다. 당시의 포병대는 비교적 효과가 약한 구탄(球彈)이나 산탄(霰彈)을 사용했지만 오늘날에는 격발유탄(擊發유彈)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유탄 한발이면 최상급의 바리케이드도 분쇄할 수 있다. 그 당시 방화벽을 돌파하려면 공병대의 곡괭이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다이나마이트탄을 사용한다. 반란자 측은 이에 반하여 모든 면에서 조건이 나빠졌다. 모든 주민층이 공명할만한 봉기는 다시는 일어날 것 같지가 않다. 그리고 계급투쟁에서 모든 중간층이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트 주위에 뭉쳐버리고, 이와 반대로 부르주아지 주위에 무리 짓는 반동정당이 거의 없어진다는 그런 사태는 아마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민’은 항상 분열상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리하여 1848년에 극대효과를 발휘했던 강력한 지렛대가 없어지고 말았다. 설사 반란자 측에 제대군인이 많이 가담한다 해도 그때는 이들 제대군인을 무장시키는 일이 그만큼 더 곤란해질 것이다. 총포상점에서 파는 엽총이나 경기용 총——경찰이 사전에 격발장치의 일부분을 빼내어 사용할 수 없게하지 않았을 경우에도——은 근접 전투에서조차 병사들의 연발총에는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한다. 1848년까지는 화약과 납으로써 필요한 탄알을 스스로 만들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총마다 탄피크기가 다르다. 같은 점은 그것이 모두 대공업의 정교한 제품이므로 즉석에서는 (ex-tempore)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특히 그에 맞는 탄알을 입수하지 못하는 한 대개의 총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그것이다. 끝으로 1848년 이래, 대도시에 만들어진 새 시가민는 길고 곧으며 노폭이 넓은 가로로 구획되어 있으므로, 새 총포가 위력을 발휘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라는 점이다. 바리케이드전을 위해 자신이 베를린 북부와 동부의 새 노동자지구를 선정하는 혁명가가 있다면, 그는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장래반란에서 시가전이란 이미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다는 말일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이것은 다음과 같다는 뜻이다.——1848년 이후의 조건이 시민전측(市民戰側)에는 종전보다 훨씬 불리해지고, 군대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유리해졌다는 그런 것만의 의미다. 그러므로 장래의 시가전은 이렇게 상황이 불리한 다른 요소에 의해 벌중될 경우에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가전이 커다란 혁명의 초기에 벌어진다는 일은 비교적 드문 일이고, 오히려 그런 대혁명 이 일어난 뒤의 경과과정에서 일어날 것인데, 이때는 종전보다도 좀 더 강대한 무력을 가지고 기도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강대한 무력은 1870년 9월 4일과 3ᅵ일에 일어난 파리에서의 위대한 프랑스 혁명처럼 소극적인 바리케이드 전술보다도 차라리 적극적인 공격전술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 카를 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48〜1850——〈1895년판〉의 머리말, MㆍE전집 제7권, 대월서점, 1976, pp. 529〜532).

레닌 : (1) 독자적인 군사 행동 (2) 군중의 지도 — 부대들은 2〜3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각이한 수효로 구성될 수 있다. 가능한 한도 내에서 부대들은 반드시 자체로서 무장하여야 한다(총ㆍ권총ㆍ폭탄ㆍ칼ㆍ격투용 팔덮개ㆍ곤봉ㆍ석유를 적신 솜방망이ㆍ밧줄 혹은 줄사다리ㆍ바리케이드를 구축하기 위한 삽ㆍ면화약(綿火藥)ㆍ유자철선ㆍ못〈기마병을 방비 하는〉기타 등등).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옆으로 부터나 위로부터나 밖으로부터의 원조를 가다리지 말고, 모든 것을 자체로서 해결할 것이다. 부대들은 가능한 한도내에서 근처에 거처하거나, 또는 정기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자주 만나는 사람들로서 구성되어야 한다(양자를 함께 적용하면 더욱 좋다. 그것은 폭동에 의해서 정규적인 접선이 차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대들의 과업은 가장 위태로운 시각 또는 불의의 조건 하에서 집합하여 있도록 일을 조절하는 것이다. 때문에 매개부대는 반드시 사전에 공동작전의 수법과 방책을 연구할 것이다. 즉, 서로 쉽게 찾기 위하여 창문 등의 표지와 군중 속에서 동무를 식별하기 위하여 약정한 신호 혹은 휘파람, 야간에 만날 경우에 필요한 지정된 신호 등등을 작성하여야 한다. 열성적인 사람이면 아무라도 2〜3 명의 동무들과 함께 이와 같은 일련의 규칙과 방법을 고안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규칙들과 방법들을 작성하고, 암송하며 그를 이용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99퍼센트의 경우에, 사건은 불의에 부닥치게 될 것이며 매우 곤란한 조건속에 집결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말 것이다. 심지어 무기없이도 부대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즉, (1) 군중을 지도하고 (2) 유리한 경우에는 경찰이나 우연히 대열에서 떨어져 있는 카자크 등등을 공격하고(모스크바에서의 실예) 무기를 탈취하며 (3) 경찰이 극히 소수일 경우에는 피검자 혹은 부상자들을 구줄하며 (4) 옥상 혹은 층층대 위에 올라가 군대에게 돌을 던지며, 끊는 물 등을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조직되고 단결된 부대가 정력적으로 투쟁하면 그것은 거대한 역량을 발휘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부대의 편성을 거절하거나 혹은 무기가 없다는 구실하에 그 편성을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부대들은 가능한 정도로 사전에 반드시 기능을 분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리 지도자나 부대장을 반드시 선출하여야 한다. 물론 계급을 제정하는 것 같은 무익한 일에 골몰하는 것은 어 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통일된 지도와 신속하고 결단성 있는 행동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 것이다. 결단성과 공격은 성공의 4분의 3이다. 부대들은 편성됨에 따라 지금 곧 이론적인 과업뿐만 아니라 반드시 실천적인 과업에 전면적으로 착수하여야 한다. 우리가 이론적인 사업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과학의 연구, 군사문제의 습득, 군사문제에 대한 강연, 좌담회에의 군인의 초빙(장교, 하사관 등등과 과거 병사였던 노동자들까지도 포함), 시가전에 관한 비합법적 소책자와 신문, 논설들을 읽으면서 분석하며, 습득하는 것 등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실천적 과업은 지체없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준비사업과 군사행동으로 구분된다. 준비사업은 온갖 무기와 탄약의 획득, 시가전에 편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옥의 선택이다(위로부터 전투하기 편리한 집과 폭탄이나 돌 또는 경관들에게 뿌릴 산(酸) 등의 창고로서 편리한 집, 또한 참모부 설치와 정보수집을 위해서와,  추격당한 사람들을 은폐하고 부상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장소 등등으로서 편리한 집). 다음에 준비할 사업으로 긴급한 탐지사업과 정찰사업이 있다. 즉 감옥, 경찰서, 각 성(省)들의 계획을 탐지하며, 관청ㆍ은행 등에서의 사업분담, 그들의 경비조건 등을 탐지하며, 유익한 연락망을 설치함에 노력하며 (경찰ㆍ은행ㆍ재판소ㆍ교도소ㆍ우체국ㆍ전신전화국 등에서의 근무자와) 무기고와 시내의 모든 무기상점 등을 탐지하는 일들이다. 과업은 태산 같다. 더우기 어떠한 사람이든지, 심지어 시가전에 전혀 참가 못 할 약한 사람들, 여자 ㆍ아이들ㆍ노인들까지도 큰 공헌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사업이 많은 것이다. 지금은 폭동에 참가할 것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대열에 결속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사업을 하겠다는 의욕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에게 무기가 없다거나, 심지어 전투에 직접 참가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할 사람은 없으며 또한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음 혁명군 부대는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준비사업에만 국한하지 말고, 가급적 빨리 군사행동으로 이행해야 한다. 그 목적은 (1) 전투력을 연마하며, (2) 적의 취약점을 정찰하며, (3) 적에게 부분적인 패배를 가하며, (4) 포로(피검자) 들을 석방하며, (5) 무기를 노획하며 (6) 폭동에 필요한 자금을 획득하기 위한 것(정부 화폐의 몰수) 등이다. 부대들은 전반적 폭동의 시기까지 절대로 과업을 지연시키지 말고 활발히 사업하기 위해서 지금 즉시로 모 든 편리한 기회를 포착하여야 또 할 수 있다. 열화 속에서 준비됨이 없이는 폭동에 서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군 부대들의 제 과업, 1905, 혁명에 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및 전술에 대하여, 학우서방, 동경, 1966, pp. 93-96).
폭동一시위一시가전一혁명군 부대一이와 같은 것이 인민적 폭동의 발전단계이다. 지금 우리는 드디어 마지막 계단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물론 모든 운동이 이미 전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최고단계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다. 운동에는 아직도 발전 못된 면들이 많으며 오데사 사건께는 낡은 폭동의 뚜렷한 흔적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발생적인 분류의 첫 파도가 이미 전체 제도의 ‘성새’ 의 문턱까지 도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민대중 자체의 선진적 대표자들의 이론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장하는 운동의 압력 밑에서 이미 투쟁이, 즉 러시아인민의 원수들과의 결정적인 투쟁이라는 새로운 최고의 과업에까지 도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제제도는 이 투쟁의 준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였다. 전제제도는 인민을 여러 해 동안 군대와의 무장투쟁에로 내몰았으며, 지금에 와서는 씨 뿌린 것을 거두고 있다. 군대 자체내에서 혁명군 부대들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부대들의 사업은 폭동을 선포하며, 기타의 모든 전쟁과 같이 국내전쟁에도 필요한 군사적 지도를 대중에게 주며, 공개적인 전인민적 투쟁의 지탱점을 창설하며, 폭 동을 인접 지방들에 파급시키며,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一비록 처음에는 국토의 크지 않은 부분에서라도一보장되며, 부패한 전제제도의 혁명적 개조를 시작하며, 하층 인민의 혁명적 창조一그들은 평화시기에는 이 창조사업에 적게 참가하지만, 혁명시기에는 전면에 진출한다一를 전면적으로 전개시키는데 있다. 오직 이와 같은 새 과업들을 인식하며, 오직 그것들을 대담하게, 그리고 광범히 제기함으로써만 혁명군 부대들은 완전한 승리를 획득하며, 혁명정부의 기둥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혁명정부는 혁명군과 마찬가지로 인민적 폭동의 현단계에 있어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혁명군은 전제제도의 군사력의 잔재를 반대하는 인민대중의 군사적 투쟁과 그들에 대한 군사적 지도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혁명군이 필요한 이유는 오직 폭력으로써만 위대한 역사적 제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며 또한 현대의 투쟁에서의 폭력의 조직체란 군사적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전제제도의 군사력의 잔재 이외에도 인접국가들의 군사력一몰락하는 러시아 정부는 그들에게 지지해 줄 것을 애원하고 있다一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언급할 것이다. (혁명군과 혁명정부, 1905, 상게서. PP. 101〜103). 
(1) 12월봉기이래 러시아에는 혁명적 인민들이 조직한 적에 대한 개별적 유격대 공격들에서 지금 표현되고 있는 군사행동들이 완전히 중지된 곳은 거의 한 군데도 없다. (2) 두 적대적 무력이 존재하는 조건 하에서는, 일시적으로 승리한 군사적 탄압이 광란하고 았는 조건 하에서는 불가피적인 이러한 유격대 행동들은 동시에 적의 와해에 이바지하며, 장래의 공공연하고 대중적인 무장 행동들을 준비한다. (3)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 민병전투대들의 전투교육과 군사훈련에도 역시 필요한 것으로서 이것들은 그들이 처음으로 겪는 새로운 일에 실천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12월 봉기 시에 허다한 곳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것을 고려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인정하며 또 대회가 그것을 인정할 것을 제의하는 바이다…
(1) 당은 당에 들어있는, 또는 당에 가담하는 민병들의 유격대 전투행동을 현 시기에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허용될 수 있고 합목적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유격대 전투행동은 그 성격상 봉기시의 노동자 대중의 지도간부들을 육성하며, 공격적 및 돌연적 군사행동들의 경험을 연구할 과업과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 (3) 이러한 행동들의 가장 주요한 직접적 과업으로 인징 하여야 할 것은 정부ㆍ경찰 및 군사기관들의 파괴이며, 또 주민에 대한 강압과 공갈에 의거하는 적극적인 흑백단적 조직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이다. (4) 적, 즉 전제정부의 소유인 자금을 강탈하여 이 자금을 폭동이 필요로 하는데 사용하기 위한 전투적 행동들도 역시 허용될 수 있는데, 주민의 이익이 될 수록 침범되지 않도록 신중한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다. (5) 유격대 전투행동은 당의 통제하에 실시되어야 하는데, 이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이 공연히 허비되지 않도록, 그리고 당해 지방의 노동운동의 제반조건과 광범한 대중의 기분이 고려되도록 하여야 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합동대 회에 제출하는 전술강령, 1906, 상게서, pp.273〜275).
이와 같은 것이 12월사변의 첫째 교훈이다. 다음 교훈은 폭동의 성격, 그 수행방법, 인민 측에로의 군대의 의거 조건들과 관련되는 점이다. 이 의거에 대한 극히 일면 적인 견해는 우리당 우익 내에서 유력하게 퍼져있다. 현대적 군대를 반대하여 싸울 수는 없으며, 군대가 혁명적으로 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만일 혁명이 대중적으로 되지 않고 또 혁명이 군대자체를 장악하지 않는다면, 중대한 투쟁에 대하여 운운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물론 군대내 공작은 필요하다. 그러나 군대의 이러한 의거를 일면, 설복과 타면 자각의 결과에 의하여 나타나는, 어떤 단순하고 단독적인 행동과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스크바 폭동은 일목요연하게 이와 같은 견해가 진부하고 생기 없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참으로 인민적인 온갖 운동에 있어서 불가피적인 군대의 동요는 혁명적 투쟁이 격화되는 때에는 군대를 전취하기 위한 진지한 투쟁을 야기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폭동은 군대를 전취하기 위한 혁명과 반동과의 그야말로 가장 강렬하고도 광포한 투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두바소프 자신이 성명하기를 모스크바 군대 1만5천 명 중에서 다만 5천명만을 신뢰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정부는 동요하는 군대를 가지가지의 가장 가혹한 수단으로써 억류하여 두었다. 즉, 그들을 설득한다든가, 그들에게 아첨한다든가, 시계와 금전 등등을 나누어 주면서 그들을 매수한다든가, 그들을 술로 마취시킨다든가, 그들을 협박한다든가, 그들을 영창에 구금한다든가, 무장을 해제한다든가, 그들로부터 가장 위험분자라고 생각되는 병사들을 반역의 죄명으로써, 폭행으로써 군대에서 떼어 내버리든가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정부보다 뒤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공공연하게 인정 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동요하는 군대를 전취하기 위하여 정부가 해낸 바와 같은, 그러한 적극적인 대담한, 진취적이며 공격적인 투쟁을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있던 힘을 이용할 줄을 몰랐다. 우리는 군대를 사상적으로 ‘감화’ 시킬 것을 준비했으며 또 앞으로도 더욱 강력히 준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폭동 시에는 군대를 전취하기 위한 육체적 투쟁도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보잘 것 없는 현학자로 되고 말 것이다. (모스크바폭동의 교훈, 1906, 상게서, pp. 138〜140).
모스크바가 우리에게 준 셋째 번 큰 교훈은, 폭동을 위한 전술과 역량조직에 관한 것이다. 군사상 전술은 군사기술의 수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차근차근 타이르듯이 설명해 준 것은 엥겔스였다. 현재의 군사기술은 19세기 중기에 있었던 그것이 아니다. 군중으로써 포격에 대항하며, 권총으로써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것은 우둔한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카우츠키가 모스크바 사변 이후는 엥겔스의 결론을 재검토할 때가 왔다는 것, 모스크바는 새로운 바리케이드 전술을 내놓았다는 것을 쓴 것은, 그는 정당했던 것이다. 이 전술은 유격전투의 전술이었다. 이와 같은 전술에 의하여 규정되는 10인조, 3인조로 되는 민활한, 극히 자그마한 부대였다. 이러한 5인조나 3인조가 논의되고 있을 때, 킁킁 코웃음 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지금 우리들은 가끔 만나게 된다. 그러나 코웃음 치는 것은 현대 군사기술의 조건하에서 하는 시가전이 야기한 전술과 조직에 대한 새 문제를 보려고 하지 않는 하찮은 방편일 따름이다. 제군, 당신들은 모스크바 폭동의 이야기를 재삼 재독하여 보라. 그러면 당신들은 5인조와 ‘새로운 바리케이드 전술의 문제와의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동상, p. 142).
성공하기 위해서는 폭동은 음모나 한 집단에 의거할 것이 아니라 선진적 계급에 의 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첫째이다. 폭동은 인민의 혁명적 앙양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둘째이다. 폭동은 성장하는 혁명의 역사가운데서 인민의 선진적 부대의 적극성이 절정에 달한 때인, 적의 대열과 그리고 불철저하며 우유부단한 혁명의 연약한 벗들의 대열 내에서 동요가 가장 심한 때인 전환기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셋째이다. 폭동에 관한 문제설정의 이러한 세 가지 조건에 의하여 마르크스주의는 블랑키주의와 구별된다. (마르크스주의와 폭동, 1917, 상게서, p. 11).
그러나 무장폭력은 신중히 숙고하여야 할 특수한 법칙에 복종하는 특수한 형태의 정치투쟁인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진리를 극히 명백하게 표현하여 무장 ‘폭동은 전쟁과 마찬가지로 예술이다.‘ 라고 썼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예술의 주요 법칙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들었다. (1) 결코 폭동을 희롱하지 말며 폭동을 개시하면 끝까지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확고하게 알아야 한다. (2) 결정적 지점에는 결정적 순간에 훨씬 더 우세한 역량을 집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보다 우수한 준비와 조직을 가지고 있는 적은 폭동자들을 전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3) 일단 폭동이 개시된 이상은 최대의 결단성을 가지고 행동하여야 하며, 기어이 무조건적으로 공격으로 넘어가야 한다. ‘방어는 무장폭동의 죽음이다’ (4) 적군이 분산되어 있는 틈을 포착하여 불의에 적을 습격하도록 노력 하여야 한다. (5) 반드시 ‘사기의 우세’를 유지 하면서 아무리 사소한 성공이라 할지라도 나날이(한 도시가 문제로 되고 있다면 시시각각으로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역사상에서 최대의 혁명적 전술의 대가인 당통의 대담하고, 대담하고, 또 대담하라’ 는 말로써 무장폭동에 관한 모든 혁명의 교훈을 집약하여 놓았다. (한국외자의 충고, 1917, 동상서, P. 20).

트로츠키 : 모든 혁명의 운명은 군대내 분위기에 균열이 생김으로써 결정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무장이 없는, 또는 거의 무장이 없는 인민대중아 군기가 엄하고, 충분히 무장했고 유능한 지휘관에 인솔되는 많은 군대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한 일 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심각한 모든 국민적 위기는 어느 정도까지 군대사기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이로부터 정말 일반적인 혁명의 제 조건과 더불어 이 혁명승리의 가능성 —— 물론 보장된 것은 아니지 만——이 발전한다. 그러나 군대는 자발적으로 반란자 측에 넘어오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선동의 결과로 그렇게 넘어오는 것도 아니다. 군대는 잡다한 요소로 구성되며, 그의 대립적 제요소는 엄한 군기의 공포로써 결합되어 있다. 결정적 순간의 전후에 혁명적 병사들은 그들이 어느 만큼의 힘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든가, 또 어떤 영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도 알지 못한다. 물론 노동대중 또한 이질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충돌에의 준비과정에서 그들의 전열을 테스트할 기회를 훨씬 많이 가진다. 파업ㆍ집회ㆍ시위는 투쟁행위일 뿐만 아니라 투쟁을 재는 척도이기도 하다. 파업에는 대중전체가 참가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스트라이크가 투쟁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첨예화된 순간에는 가장 대담한 분자가 가두에 나선다. 우유부단한 자, 피로하여 지쳐있는 자, 보수적 경향을 가진 자들은 집안에 틀어박힌다. 여기서는 혁명적 도태(淘汰)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사건이라는 체를 통하여 체별 된다. 그러나 군대는 사정이 좀 다르다. 혁명적인 병사——동정적인 자, 동요분자, 적의를 품는 자——는 모두가 강제적인 군율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데, 이런 실(系)은 모두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까지 장교의 손아귀에 쥐어 있다. 병사는 매일처럼 앞줄이나 뒷줄로 배치된다. 그러므로 그들을 여하히 충성스럽고 온순한 분자와 반란분자로 구별 할 수 있단 말인가? 병사가 혁명측으로 넘어오는 순간은 오랜 동안에 준비된 심리적 작용에 의한다. 그리고 이 작용은 다른 작용 과 마찬가지로 클라이막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클라이막스점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어떤 부대는 민중과 합류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으면서도 필요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고 있을런지 모른다. 혁명의 지도자는 아직 그런 군대를 자기편 진영에 가담 시킬 가능성을 믿지 않음으로써 승리를 놓쳐버리는 수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성숙되어 있으면서도 실현되지 않는 반란이 있은 후 반동파가 군대를 장악하는 수도 있을 수 있다. 이때는 병사들도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던 희망을 잃게 된다. 그들은 군기라는 멍에 앞에 또다시 굴복하여 노동자와의 새로운 충돌이 발생할 경우, 특히 먼 곳에 있어서는 반란자에게 대항하게 된다. 이와 같은 작용 가운데는 평가하기 곤란한, 내지 계량하기 어려운 많은 요소가 있으며 무수히 많은 혼류(混流),집단적인 암시 및 자기암시가 있다. 그러나 이의 물질적 및 정신적 제력(諸力)의 얽히고설킨 망 속에서 매우 선명한 하나의 결론이 도출된다. 즉, 혁명진압이 끝난 다음 병영에 돌아가 보고할 그 폭동이 단순한 인민의 시위행진이 아니라 결사적인 투쟁이었다는 것, 만일 그들이 인민 편에 가담했더라면 인민이 승리했을 것이며, 그리고 이 승리는 자기들의 안전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운명을 완화시켰을 것임을 집단적인 병사가 확신하고, 또 이것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들은 한발자국 더 나아가 자기들의 총칼 방향을 돌리거나 또는 그것을 휴대하고 인민 편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그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혁명가는 그들 자신이 여하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아니 피를 홀리더라도 승리를 획득할 결의를 참으로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병사의 기분에 균열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결심은 비무장 그대로서는 절대로 혁명을 할 수 없고, 또 결코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러시아 혁명사 제1권 상, 각천서점, 동경, PP. 166〜168).

모택동 : 다섯째로, 홍군과 유격대와 홍색지역의 창설, 발전은 반식민지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영도 하에 진행되는 농민투쟁의 최고형태이며, 반식민지 농민투쟁 발전의 필연적 결과이며, 또한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이 전국적 범위에서 혁명의 앙양을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여섯째로, 단순한 유동적 유격정책으로는 전국적 범위에서 혁명의 앙양을 촉진하는 과업을 완수할 수 없고 주덕(朱德)—모택동(毛澤東)적, 방지민(方志敏)적 정책, 즉 근거지를 가지며, 계획적으로 정권을 수립하며, 토지혁명을 침투시키며, 향적위대(鄕赤衛隊), 구(區)적위대대, 현(縣)적위대, 지방홍군을 거쳐 정규적 흥군에로 발전시키는 노선을 통하여 인민무장력을 확대하며 파장식(派狀式)확대를 통하여 정권을 발전시키는 등등의 정책이 의심할 바 없이 정당하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한 점의 불꽃도 요원의 불길로 타오른다, 1930, 모택동선집 제1권, 외문출판소, 북경, 1968, pp. 143〜144).
중국은 사정이 다르다. 중국의 특성은 독립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반(半)식민지ㆍ반(半)봉건적 국가이며 내부적으로는 민주주의 제도가 없고, 봉건제도의 압박을 받고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민족적 독립이 없고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고 있는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용할 의회가 없으며,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파업을 일으킬 합법적인 권리가 없다. 이런 나라의 공산당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장기간의 합법적 투쟁을 통하여 봉기와 전쟁에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먼저 도시를 점령하고 후에 농촌을 탈취하는 것도 아니며, 이와 상반되는 길을 걷는 것이다. (전쟁 과 전략문제, 1938, 상게선집 제12권, pp. 286 〜287).
(6)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각개 섬멸하는 원칙은 지금에 와서 비로소 제기된 것이 아니라 우리 군대가 창건된 그때로부터 근 20년간에 걸쳐 내려온 훌륭한 전통이다. 그러나 항일시기에 우리 군대는 병력을 분산시켜 유격전을 하는 것을 주로 하고, 병력을 집중하여 운동전(運動戰)을 하는 것을 보조로 하였다. 지금의 내전시기에 있어서는 정형이 변화되었으니 만큼 작전방법도 개변되어야 한다. 즉, 우리군대는 병력을 집중하여 운동전을 하는 것을 주로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유격전을 하는 것을 보조로 하여야 한다. 더욱이 장개석 군대의 무기가 강화된 조건하에서 우리 군 대는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각개 섬멸하는 작전방법을 특히 강조하여야 한다. (7) 적이 진공적 지위에 처하여 있고 우리가 방어적 지위에 처하여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이 방법을 적용하여야 한다. 적이 방어적 지위에 처하여 있고 우리가 진공적 지위에 처하여 있을 때에는, 두 가지 정형을 구별하여 각 이한 방법을 취하여야 한다. 아군의 병력이 많고, 당지의 적군이 비교적 약하거나 또는 아군이 적에게 불의의 습격을 가하는 경우에는, 몇 개 부분의 적군을 동시에 공격하여도 된다. 예를 들면 6월 5일부터 6월 10일 까지 산동성의 아군은 청도—제남 간 철도와 천진一포구간 철도연선의 10여개 도시를 동시에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또 예를 들면 8월 10일부터 8월 21일까지 우리의 유백승(劉伯承)=등소평(鄧小平)부대는 천수(天水)—연운항(連雲港) 간 철도의 개봉(開封)一서주(徐州) 간에 있는 10여개 도시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아군의 병력이 부족할 경우에는 몇 개 도시의 적들을 동시에 공격하지 말고,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 여러 도시를 하나하나씩 탈취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산서성(山西省)에서 아군은 대동(大同)一풍릉도(風陵渡) 간 철도에 있는 여러 도시를 바로 이렇게 탈취하였다.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각개섬멸하자, 1946, 상게전집 제4권, pp. 112〜113).
17개월 동안(1946년 7월부터 1947년 11월까지이고, 12월분은 아직 계산에 넣지 않았다)의 작전에서 장개석의 정규군과 비정규군 도합 169만 명을 살상, 포로 하였는데 그중 살상한 것이 64만 명이고, 포로한 것이 105만 명이다. 이리하여 아군은 장개석의 진공을 격퇴하고, 해방구의 기본지역을 보존하게 되었으며, 또한 진공에로 넘어가게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은 것은 군사적면에서 말하면 정확한 전략적 방침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군사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분산되고 고립된 적을 먼저 치고 집중되고 강대한 적을 후에 친다. (2) 소도시, 중도시 및 광활한 농촌을 먼저 탈취하곤, 대도시를 후에 탈취한다. (3) 적의 유생역량(有生力量)을 섬멸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하고, 도시와 지방을 고수하거나 탈취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하지 않는다. 도시와 지방을 고수하거나 탈취하는 것은 적의 유생역량을 섬멸한 결과로 달성되는 것이며, 흔히 여러 차례 반복하여야만 이를 종국적으로 고수하거나 탈취할 수 있다. (4) 매번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적보다2배, 3배, 4배, 때로는 심지어 5배 혹은 6배나 되는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4면 포위함으로써 극력 전멸을 기하며,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특수한 정황 하에서는 적에게 섬멸적 타격을 주는 방법을 취하여, 즉 전력을 집중하여 적의 정면 및 그 일익 혹은 양익을 쳐서 그 일부를 섬멸하고 그 다른 일부를 격파하는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아군이 병력을 신속히 이동시켜 적군의 다른 부대를 섬멸할 수 있도록 한다.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적거나 또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상등한 소모전은 극력 피한다. 이렇게 하면 전체에 있어서는 우리가 열세 (數的으로)이지만 매개의 국부(局部), 매개의 구체적인 전역에 있어서는 우리가 절대적 우세로 되어 전역의 승리가 보장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전체에 있어서도 우세로 전변되며, 나중에는 모든 적을 섬멸 하게 될 것이다. (5) 준비없는 싸움은 하지 않고, 자신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싸움마다 극력 준비가 있도록 하며, 적아조건의 대비 하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도록 하여야 한다. (6) 용감하게 싸우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피로를 겁내지 않으며, 연속작전을 하는(즉 단기간 내에 쉬지 않고 연거퍼 몇 차례 싸움을 하는) 작풍을 발양한다. (7) 극력운동 중에서 적을 섬멸하도록 한다. 동시에 진지공격전술을 중요시하여 적의 거점과 도시를 탈취한다. (8) 도시를 공략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의 수비가 약한 모든 거점과 도시는 견결히 탈취한다. 적이 중등정도의 수비를 하고있고, 또 환경이 탈취할 것을 허락하는 모든 거점과 도시는 기회를 보아서 탈취한다. 적의 수비가 튼튼한 모든 거점과 도시는 조건이 성숙되는 때를 기다려 탈취한다. (9) 적에게서 노획한 전부의 무기와, 포로한 대부분의 인원으로 자기를 보충한다. 아군의 인력과 물력의 원천은 주로 전선에 있다. (1〇) 두 전역(戰役)사이의 틈을 잘 이용하여 부대를 휴식시키며, 정비 훈련한다. 휴식정비의 훈련 기간은 일반적으로 너무 말아야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적에게 숨돌릴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한다. 상술한 것들이 곧 인민해방군이 장개석을 격멸하는 주요한 방법이다. (현정세와 우리의 과업, 1947, 상게서, pp. 175〜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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