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 羅雲奎 1902-1937 ] ()
영화인. 호는 춘사春史. 함북 회령 사람. 16살에 간도로 건너가 고학으로 중학을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가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머슴살이를 하며 만주·연해주를 방랑, 1920년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들어갔다. 21년 입국했으나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 감옥생활을 통해 그의 사상과 현실인식은 더욱 심화되었다. 24년 조선키네마사에 입사함으로써 예술 활동을 시작, <심청전> <장한몽> 등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였고, 26년 <아리랑>의 제작·감독·주연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27년 나운규 프로덕션을 세웠으나 경영난으로 2년 만에 해체했다. 36년 <아리랑 3편>에서는 녹음장치에 성공, 한국영화의 유성영화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그의 1930년 이전 작품은 철저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일제에 대한 증오와 저항, 미래지향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주로 재정부담 때문에 흥행위주 작품에 치중, 그나마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카프KAPF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항일민족정신을 영화로 완벽히 구현해냄으로써 카프영화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아리랑> <풍운아> <들쥐> <잘 있거라>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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