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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유(李載裕, 1905~44) 金小成 全素洙] ()

(고려공청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 함남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의 빈농 집안 출신으로, 1924년 무렵까지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다가 고학을 목적으로 상경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학자금 사정으로 중퇴했다. 1925년 3월 개성 송도고보에 입학하여 재학중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고 동맹휴학을 주동했다. 이 사건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 토오꾜오(東京)로 건너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토오꾜오제국대학 신인회(新人會)가 주최하는 노동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습득했다. 1927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3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입당하여 토오꾜오 조선노동조합에 조직된 당 프랙션의 책임자가 되었다. 5월 고려공청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 무렵 토오꾜오 조선노동조합 각 지부에 공청원을 책임자로 하는 프랙션을 조직하고 지도했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경성지법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다.
(경성뜨로이까 책임자) 1932년 12월 만기출옥했다. 1933년 5월 조공 재건을 위해 경성뜨로이까를 결성하고 책임자가 되어 이순금(李順今), 변홍대(卞洪大) 등을 공장지대에 배치했다. 소화제사, 경성고무, 조선견직, 종연방직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경성뜨로이까의 성원을 동원하여 파업을 배후에서 지도했으며,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등 7개 중등학교의 동맹휴학과 교사배척운동을 지도했다. 12월 정태식(鄭泰植)을 통해 경성제국대학 교수 미야께(三宅鹿之助)와 만나 운동정세를 토론하면서 새로운 운동방침을 모색했다. 1934년 1월 체포되었으나 경찰서 유치장에서 탈출했다. 탈출 이후 미야께 교수 집에 은거하면서 조직을 복구하고 권영태(權榮台)그룹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5월 미야께가 체포되자 도로공사장 인부로 신분을 위장한 뒤 조직의 복구에 힘썼다. 11월 이관술(李觀述), 박영출(朴英出)과 함께 경성재건그룹을 건립했다. 1935년 1월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하기 위해 이관술과 함께 양주군 공덕리에 은거했다.
(조공재건경성준비그룹 책임자) 경성재건그룹이 와해된 뒤 반파쇼운동, 좌익전선 통일운동 등을 모색했다. 1936년 10월 조공재건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고기관지 『적기(赤旗)』(3회 발행)를 발간했다. 그해 12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법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도 전향을 거부한 채 옥중투쟁을 전개했다. 1937년 초 감옥에서 자술서 형식으로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의 능부(能否)」라는 글을 남겼다. 이 문건에서 당시의 운동정세를 전적 위기가 성숙한 혁명적 정세로 파악했으며,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조선혁명의 성격을 자본성 민주주의혁명으로 간주했다. 자본성 민주주의혁명은 조선독립과 노동자 농민정부(쏘비에뜨 형태의) 수립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이 문건에서 계급 대 계급 전술을 여전히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전민중적인 반제반파쇼전선’의 결성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형무소 수감중 옥내(獄內)공산주의자동맹의 교양책을 맡았다. 1944년 10월 청주예방구금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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