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책 처음으로 | 사전 | 자유게시판 | 회원자료 | 로그인

 

       ■ 의견바로가기

[유진희(兪鎭熙, 1893~?) (號)甲世 無我 眞希] ()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충남 예산 출신으로, 1910년 예산 배영학교에 입학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에 참여하고 편집부를 맡았다. 그해 가을 사회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다. 10월 『공제(共濟)』 제2호에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찰」을 발표하면서 노동문제는 사회주의와 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주-소작인 관계를 노동자-자본가 관계로 등치시켜 소작운동을 농촌의 노동운동이라고 정의했다.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경성본회 예비정기총회에서 조선노동공제회 제1차 연합정기총회의 경성본회 대표자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5월 고려공산당 대표자회의에 국내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기관지부를 담당했다.
6월 경성의학전문학교 맹휴운동이 일어났을 때 경성의전 동창회 조선인 대표로서 중재활동을 했다. 9월 ‘한국인민은 글월을 태평양회의에 드림’이란 청원문에 조선노동공제회 대표로 서명했다. 1922년 11월 잡지 『신생활』에 논문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을 발표했다가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검거되어 1923년 1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조공 중앙위원, 한국민주당 중앙상무집행위원) 1924년 7월 오르그뷰로(고려공산당 창립대회 준비위원회) 국내위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이성(李成)과 접촉했다. 10월 『시대일보』 기자가 되었고, 이 무렵 화요회에 참여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말 ‘제1차 조공 검거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32년 잡지 『신계단』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었다. 11월 『신계단』에 기자 남만희(南萬熙)가 쓴 「종교시평」이 빌미가 되어 천도교도에게 폭행당했다. 그 직후 ‘천도교정체 비판폭로회’ 결성대회에 참여하여 반천도교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직후 조선민족당 발기에 참가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조사부장이 되었다. 1946년 5월 한국민주당 사회문제대책분과위원, 10월 한국민주당 중앙상무집행위원을 지냈다.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官選)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7년 1월 신탁통치반대 결의안에 서명했다.
■ 인접어

유재성(劉載成, 1906~?) 劉載星
유재호(劉載湖, 1910~?) 劉哲宇 劉一
유지원(劉志遠, 1902~?) 劉重建 劉昊天
유진걸(柳震杰, 생몰년 미상) 柳丹 正龍不知 中原正毅)
유진구(柳震九, 1901~22) (號)海史
유진희(兪鎭熙, 1893~?) (號)甲世 無我 眞希
유진희(兪鎭熙, 1893~?) (號)甲世 無我 眞希
유차을(柳且乙, 1910~?)
유찬옥(柳贊玉, 1912~?)
유축운(柳丑運, 1913~?)
유치오(兪致五, 1908~?) 金商吉

뒤로
■ 의견

 



HOME - 후원방법 안내 - CMS후원신청 - 취지문 - 사용 도움말 - 회원탈퇴하기

2002 노동자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만들기 모임
120-702 서울시 중구 정동 22-2 경향신문 별관 202호 44
laborsbook@gmail.com
모바일버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