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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金榮萬, 1899~?) 金億萬 秋鋒 秋峯 金昌基 田耕春 金福汝 金斤] ()

(고려공산동맹 민족부 책임자) 충남 논산 출신으로, 1920년 2월 조선노동대회 결성에 참여하고 간사가 되었다. 5월 조선노동대회의 별동조직인 조선민단(朝鮮民團) 결성에 참여했다가 7월 ‘조선민단 강연회 설화(舌禍)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23년 3월 서울청년회 간부로서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준비했고 7월 양말직공 파업 전말(顚末) 강연회에서 ‘우리의 무기’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8월 공산주의 각 그룹의 알력으로 발생한 ‘낙양관(洛陽館)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1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24년 7월 출옥했다. 10월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부를 담당했다. 11월 적박단(赤雹團) 결성에 참여하고 12월 북풍회 사무소를 습격했다. 같은 달 사회주의자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3월 경성노동회 집행위원이 되었고 서울청년회 주최로 개최된 빠리꼬뮌 기념강연회에서 ‘꼬뮌의 사(死)를 추억함’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같은 달 재경조선해방 운동자단체 연합간친회에 청년당사(靑年黨社)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이 되었다. 4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 전국연합위원회’ 결성에 참가하여 임시집행위원이 되었고,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를 위한 서무부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월 서울청년회 주최하에 개최된 중국 맹파(盟罷) 동정연설회에서 연설을 했다. 8월 경기도청년연합회 발기준비회 선전부를 맡았다.
(春景園黨 간부) 1925년 10월 코민테른에 화요파 중심의 조선공산당 결성에 반대하는 서울파의 견해를 전달하고 1926년 봄 귀국했다. 1927년 3월경 코민테른에 조선 내의 운동전선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그해 여름 귀국했다. 10월경 한때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12월 조공 제3차 대회 [춘경원당]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1928년 3월 코민테른의 지부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9년 3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 발기회 결성에 참여하여 선전부를 맡았으며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했다. 8월 범태평양노동조합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블라지보스또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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