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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운동] ()

(1) 한국의 근대적 농민운동은 일제치하에서의 민족해방운동과 결부되어 비롯된다. 물론 근대적 농민운동의 시초는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이조말 부패한 양반지배계급에의 저항과 외국자본주의 침략세력을 배제하기 위하여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1984)을 드는 것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동학 혁명은 그 주체가 비록 농민이라고는 하나 자각된 집단이라 볼 수 없고 지도층 또한 근대적 의식의 결여와 조직력의 미숙 등으로 말미암아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이는 우리 민족의 해방과 결부된 농민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1906년(광무 10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 되었을 때 전후 약 5년간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의병운동이 맹렬한 기세로 일어났다. 그러나 이는 토지소유의 근대화투쟁과 분리됨으로써 농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고 또한 의병을 주도하는 자들의 봉건적이며 개별적인 행동양식으로 인하여 쉽사리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근대적 의미의 농민운동은 일제의 한국지배정책과 결부되어 비롯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병 뒤 곧장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대규모의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토지를 착취, 총독부는 조선지배 10년만에 한국 최대의 토지소유자가 되었는바 1930년도 총계에 의하면 전답 · 임야 888만 정보로 무려 전국토의 40%를 총독부가 차지한 셈이었다. 이와 같이 방대한 토지는 일제의 한국지배장치의 하나인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하여 불이농장(不二農場) · 편창농장(片倉農場) 등 일본인 토지회사에 불하되고 한국인 중에도 친일파 회유의 특전으로 사용되어 하루아침에 대지주가 되어 봉건적인 특권을 물려받은 자도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많은 농민은 영세한 소작농으로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6년의 총계에 의하면 全농가호수 264만호 중 자작 겸 소작농 및 총소작농이 204만 호로 전농가의 79.4%의 절대다수를 차지했고, 1924년의 총계에 의하면 전농가 호수 272만 8921호 중 1년 수지가 적자인 농가가 127만 3326호로 44.6%를 차지하고 있어 농가의 약 반이 매년 빚을 져야만 살 수 있는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1919년의 3 · 1 운동은 이와 같은 농촌의 궁핍화에 의해 농민을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참여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족해방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토지문제의 해결 방법은 제기되지 않고 일제는 이를 문화주의적 방식으로 대응함에 따라 농민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1920년 이후에 점점 심해진 소작쟁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1922년에는 겨우 24건에 참가 인원 2,539명이었던 소작쟁의가 1925년에는 204건에 참가인원 4,002명, 1930 년에는 720건에 참가인원 13,01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소작쟁의의 全사건의 60%가 소작권 이동에 대한 반대였고, 다음으로 소작료 감하 요구가 全사건의 18%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물론 소작쟁의라는 농민들의 경제투쟁뿐만 아니라 일제에 대한 민족적인 자각에서 오는 해방운동과 결부되어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 경부터는 일본의 한국지배가 더욱 광포해져서 신간회 등의 정치단체가 해산되고 일체의 평화적인 운동이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농민운동은 무장투쟁의 양상을 띠게 된다.
(2) 일제식민지 하의 농민운동이 한국에서 최초로 “전국적인 성격을 가진 대중적 노동단체”로서 출현했던 것은 1920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조선 노동공제회였다. 이 노동공제회는 노동자의 상호부조와 계몽사업을 하기 위해 창립된 것이었지만, 여기에 망라된 노동자나 농민들은 실천적 활동을 하는 가운데 이 조직을 단순한 상호부조적 성격을 가진 조직에서 노동자 · 농민의 대중적 투쟁을 지도하고 원조하기 위한 노동단체로 전환시켰다. 노동공제회는 창립 후 곧 전국 각지의 중요 산업중심지와 기타 지방에 15개의 지부와 3개의 분회를 설립하고, 기타 다수의 기존 노동단체를 자기 산하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하여 노동공제회는 공장노동자와 자유노동자를 기본적인 구성원으로 했지만, 하부조직인 지방 지부에는 농민부 또는 소작인부를 설치하여 농민의 결집을 꾀했다. 노동공제회의 지방조직은 소작인조합 결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1922년 8월에는 “소작인은 단결하라!”라는 선언을 발표하고 대(對) 지주 · 자본가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해야 한다고 소작농민에게 호소하였다. 노동공제회 하부조직의 이러한 활동에 의해 지방의 여러 조직에는 다수의 소작농민이 결집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노동공제회 진주지회에서는 1922년 3월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소작인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하고, 동년 9월에는 한국에서 최초로 군내 소작인 대회를 개최, 군내 각면의 대표자가 참석한 가운데서 동 지회 내에 임시소작부를 설치하고 20명(후에 50명으로 증원)의 실행위원을 배치하였다. 이리하여 이 임시소작부는 농민의 대(對)지주투쟁을 직접적으로 지도 조직하였다. 이 노동공제회 진주지회가 소집한 소작인대회는 한국 각지의 농민들을 결속시키기 위한 신호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각지에 존재하고 있던 소작인조합의 대(對)지주 활동을 적극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공제회는 1922년 10월에 해산되었으나 이의 결성과 활동을 계기로 하여 전국 각지의 농촌에서는 면(面) · 리(里) 단위의 소작인조합 · 농민조합 · 소작상조회 · 농우회 · 농민공제회 · 작인동맹 등 각종 명칭을 가진 다수의 소작인 중심의 농민단체가 속속 결성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농민이 주체적인 결합조직을 이루어 나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지주들은 1921년 8월 서울에서 〈조선소작인상조회〉라는 어용농민조직을 설립했다. 이 어용단체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지배권력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당시 대(對) 지주쟁의가 계속 일어나고 있던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소작인조합에 결집하기 시작했던 소작농을 자신들의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광분하였다. 이 소작인 상조회는 지주 · 소작인 간의 협조, 지주 · 소작인의 공존공영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反)농민적 본질은 대(封)지주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던 농민들에게 간파되어, 이 조직은 농민들에 의해 배격당하거나 또는 농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조직으로 개편되거나 했다. 그리고 동시에 농민들은 이 소작인상조회의 출현을 계기로 하여 합법적 농민단체를 전국 각지에 창립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923년에 들어와서부터 면과 리단위로 고립분산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소규모 소작인조합은 우선 군 단위의 연합체로 개편하는 한편 노동자단체들과 1924년에는 지역적 연합운동을 벌여 1924년 1월 진주에서 진주노동공제회, 마산노농동우회, 부산노동동맹 등의 공동주최로 경상남도 지방노농운동 간친회가 개최되고 같은 해 3월 광주에서는 98개 단체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전라남도노농연맹이 결성되어 지방적으로 통일된 노농단체가 성립되었다. 또 같은 달에 대구에서는 64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남조선 노농동맹을 창립하였다.
한국 남부지방 각지에서 전개된 이상과 같은 노농단체의 결합운동을 기초로 하여 1924년 4월 서울에서 조선노농총동맹이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의 조선노농총동맹에는 174개의 노농단체가 가입했는데 그 이후에도 많은 노동자 · 농민이 가입하였다.
조선노농총동맹은 그 강령으로 “노농계급의 해방, 완전한 신사회의 건설, 자본가계급과의 철저한 투쟁, 노농계급의 복리증진 및 경제적 향상”등을 내걸었다. 창립대회에서는 물론 소작문제 · 농민문제가 토의되었는데, 그 결정은 이제까지 논의되어 왔거나 결정되었던 것을 기초로 하여 구체화한 것이었다. 이 노농총동맹은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농민단체를 통일적으로 지도 · 원조하기 위하여 많은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소작인조합은 전국적인 통일조직을 가짐으로써 자기 조직을 확대 ·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짐과 동시에, 이러한 전국적 조직의 지도와 원조에 의해 한국 각지에 속속 농민단체가 결성되었다. 이제 1921년 이후의 농민단체수를 보면 1921년에 3개밖에 없었던 농민단체는 1922년에는 23개, 1923년에는 일약 107개로 급증하고, 1924년에는 112개, 1928년에는 126개로 증가한다. 또한 1926년 9월의 「남선사도(南鮮四道)농민 단체조사」에 의하면 농민단체수는 전라남도에 83개(조합원수 11,938명), 전라북도에 11개, 경상남도에 29개, 경상북도에 10개가 존재했다.
(3)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창립된 지 바로 1년이 지난 1925년 4월에 한국의 노동자 · 농민운동과 그것을 기초로 한 민족해방운동의 전위부대로서 조선공산당이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노동자계급의 전위조직으로서 공산당이 출현함으로써 당시 발전도상에 있던 한국의 노농운동은 더욱 강력히 고무되었다. 조선공산당의 창립 이후 농민조직에 일어났던 변화로서는, 첫째로 소작인조합이 농민조합으로 개편된 것이고, 둘째로 조선노농 총동맹이 조선노동 총동맹과 조선농민 총동맹으로 발전적으로 분리된 점이다.
첫번째의 소작인조합의 농민조합으로의 개편은 단순한 명칭의 변경이 아니라 농민조직의 내용상의 변화와 내적으로 관련된 것이었다. 즉 종래의 소작인조합은 주로 소작빈농을 주력으로 하는 소작농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개편된 농민조합 내지는 새로 결성된 농민조합에는 소작농이 물론 주력으로 결집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에 더하여 자작빈농과 자작중농도 가입하였다. 이들은 자작빈농, 자작중농이라고 해도 일본제국주의와 지주에 의해 갖은 압박과 착취롤 받고 있었다. 이리하여 자작중농은 끊임없이 빈농으로 전락하고 있었고 또 중농의 대부분은 사실상 빈농화되고 있었다.
소작인조합의 농민조합으로의 개편은 1926년부터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1926년 1월 초에 전라남도 무안농민 연합회가 무안농민조합으로, 같은 해 1월 말에는 암태소작회가 암태농민조합으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1926년 중에 대대적으로 농민조합으로 개편됨과 동시에 새로 결성되기 시작한 농민단체도 대체로 농민조합이라는 명칭을 갖고 출현하였다.
둘째로 조선노농 총동맹의 분리문제인데 이것은 조선공산당의 지도하에 행해진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창립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조선공산당이 위로부터 기계적으로 강제한 것이 아니라, 농민운동의 발전 자체가 이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 발전적 분리를 농민운동측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할 수 있다. 즉, 당시 항일농민운동은 조선노농 총동맹이라는 통일적 지도 기관을 가짐으로써 조직적 · 집단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또 소작쟁의가 발생한 경우에 조선노농 총동맹은 직접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노농총동맹의 지도부는 조선총독부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검거 · 탄압당했으며 또 노농총동맹이 주최하는 모든 집회는 금지되었다. 물론 노농총동맹의 소작쟁의에 대한 지원활동도 탄압당해 이 통일조직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은 뚜렷하게 곤란해졌다. 이로 인하여 노농총동맹은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탄압에 굴하지 않는 한층 구체적이고 세련된 지도가 요청되기에 이르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노농총동맹의 기구를 세분하여 노동자 · 농민별로 이루어진 단일 중앙지도기관을 설치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이리하여 1927년 9월, 조선노농총동맹은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되면서 각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지도하는 독립된 전국적 중앙조직이 되었다.
그런데 조선농민총동맹은 창립 당초부터 산하에 32개의 농민단체와 24,180 명의 농민을 두고 있었다. 전국 농민운동의 총본산인 농민총동맹은 “농민들은 단결하여 단체의 위력으로 자본가계급과 싸우고 농민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의 실현을 기한다”는 목표 아래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공산당의 출현과 농민총동맹의 창립 이후 농민조합은 삼남지방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급속히 확산추세를 보였다. 특히 북부지방과 동해안 일대에 새로운 농민조합이 속속 출현했다. 그 대표적 농민조합의 예를 들면, 1926년에 평북의 선천농민조합, 함남의 북청군 양가면 농민조합, 1927년에 함남의 정평농민조합(정평농우회), 경기도의 부평 농민조합 · 강원도의 양양 농민조합과 삼척 농민조합이다. 이리하여 한국의 농민조직은 1926년의 119개에서 1928년에 307개로 급증했다.
그러면 농민조합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시기에 이것을 지도하는 단일한 중앙기관이었던 농민총동맹은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의 농민총동맹은 전국 각지의 농민조합이 간절히 바랐던 통일적이고도 구체적인 투쟁지도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 첫째 원인은 농민총동맹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철저한 탄압이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지배권력은 농민총동맹 전국대회를 금지했을 뿐 아니라 농민총동맹이 주최하는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중앙위원의 간단한 회합마저 허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농민총동맹 강령초안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공표를 금지하고, 규약 초안을 하부조직에게 배포하는 것도 허가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농민총동맹은 결성 초기부터 활동이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둘째 원인은 농민총동맹 지도부의 ‘우경투항주의’에 있었다. 농민총동맹의 주요 간부는 농민총동맹이 일본 제국주의의 광포한 탄압 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직과 운동의 합법성을 일면적으로 유지하려고 함으로써, 전국 각지의 농민운동이 점차 대중적 폭동의 형태로 이행해 가고 있는 운동 실태에 눈을 돌리지 않고 운동을 어디까지나 합법의 틀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하였다. 이것은 농민총동맹의 농민운동 지도가 현실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항일농민투쟁에 뒤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농민총동맹은 농민운동의 통일적인 지도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째 원인은 농민총동맹의 지도적 간부 사이에 벌어진 분파항쟁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공산당 내 분파항쟁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4) 한국의 항일농민운동은 1930년 경부터 합법적 농민조합이 비합법적 조직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재편되기 시작한다. 조선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의 수차에 걸친 대탄압과 끊임없는 분파항쟁으로 인해 전위당으로서의 지도력과 조직망이 파괴, 1928년에 조선공산당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조선공산당 해산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노농대중 속에 들어가 농촌 속에 “전투적 조직으로서의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 1930년 이후 전국 각지에, 특히 함경남북도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지방에 군을 단위로 하는 적색농민조합이 속속 나타나게 되었다. 함경남도의 정평 · 단천 · 영흥 · 흥원 · 복청 · 문천 · 안변 · 함주 · 갑산 · 함경북도의 성진 · 길수 · 명천 · 어대진 · 주을, 평안북도의 신의주, 황해도의 재령, 강원도의 삼척 · 경기도의 수원, 전라남도의 광주 · 나주 · 여수 · 광양 · 전라북도의 옥구 · 경상남도의 양산 · 김해 등 각지에 〈적색농민조합〉이 출현했다.
이러한 합법적 농민조합의 비합법적 적색농민조합으로의 개편을 통해 종래 농민조합의 지도부에 들어와 있던 빈농출신이 아닌 지도층이 물러나고 새로이 빈농출신의 젊은 층이 지도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소작인조합으로부터 농민조합으로 재편될 때에 발생했던 농민조직의 비(非)빈농적인 성격이 불식되고 농민조합의 혁명적 전투성이 강화된 것이었다. 또 혁명적 농민조합은 농촌에서의 항일역량을 총결집하기 위해 합법적 활동이 불가능해진 청년동맹 · 여성동맹 · 소년동맹을 자기조직으로 편입하여 각각 농민조합의 청년부 · 소년부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혁명적 농민조합은 농촌에서의 〈대중적 비합법조직〉으로서 그 체제와 힘을 정비했다.
혁명적 농민조합은 당시 대중적 폭동형태를 띠면서 전개되고 있었던 항일농민운동을 지하에서 강력하게 지도했다. 이러한 비합법조직으로서의 적색 농민조합도 식민지 지배권력의 철저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1930년에는 단청농민조합(함남) · 홍원농민조합(동) · 영흥농민조합(함남) · 1932년에는 양산농민조합(경남) · 성진농민조합(함북) · 양양농민조합(충북) · 1933년에는 북청농민조합(함남) · 안계농민조합(경북) · 1935년에는 명천농민조합(함북) 등의 적색농민조합이 대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대탄압과 대대적인 검거에도 불구하고 적색농민조합은 교묘한 조직형태로 농촌 깊숙히 그 조직망을 확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광포한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어수단을 강구했다. 예를 들면, 만주지방 항일무장투쟁의 직접적 영향 하에서, 1934년부터 38년까지 일제 식민지통치기관 및 제국주의 약탈자 등에 대한 무장습격과 친일주구 · 민족반역자에 대한 타도, 그리고 일제 권력의 테러적 검속에 대한 〈동지탈환투쟁〉을 전개한 명천농민조합의 투쟁사례가 대표적이다.
1934년 봄, 이 지역의 농민들은 소작쟁의로서 또는 고리대의 착취와 소작권의 박탈, 납세에 반대하고 강제부역과 고농(雇農)에 대한 착취와 박해에 반대하여 빚문서를 소각하는 등 각종 방법으로 싸웠다. 또한 그들은 「농민투쟁기」, 「돌격대」 등 각종 출판물과 야학회, 강연회 등을 통해서, 혹은 일제가 만든 농촌진흥회 등을 역으로 이용하면서 싸움을 전개하는 한편 무수단에서 성진에 이르는 임동선 군용도로 부설공사에의 동원을 거부하고 군량미로 사용될 양곡 수집을 거부하였으며 일제가 군수품 공급을 목적으로 만든 양종장 설치와 일본군의 군사훈련에도 반대하여 싸웠다. 이같은 투쟁양상은 1935년에서 1936년 사이에 이르는 명천농민들의 경우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동과 면마다 계엄대 · 동지탈환대 · 규찰대 · 연락대 등을 조직하여 일제의 탄압과 검거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였다. 이같은 명천농민들의 싸움은 노동자 · 어민 · 학생 · 부인 등에게도 영향을 미쳐 성진일대의 민중들은 이들을 적극 지원했다. 이들의 투쟁에 대해 당시 일제는 “주요한 간부는 동굴을 파서 그 속에 잠복하고, 모든 공작은 이 동굴에서 진행되었으며 관헌에 의한 발각을 극력 방지했다.……(이런 동굴이) 오늘날까지 발견된 것만도 35개 소에 달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완강한 투쟁을 4년간이나 전개하였던 명천농민들의 투쟁도 경찰의 탄압과 테러로 인해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명천농민운동은 일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식민지 지배 착취에 저항하는 조선농민들의 혁명성을 과시한 투쟁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5) 그러나 이상과 같은 30년대의 혁명적 농민운동도 40년대에 들어서면서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탄압과 착취를 이기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첫번째 암흑기라 할 수 있는 1940〜1945년이 경과하고 8 · 15해방을 맞이함에 따라 농민운동은 다시 전국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조직(전농 결성당시 전국적으로 239개)되고, 이를 통합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1945년 12월 8일 결성, 일제와 민족반역자 및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양심적인 조선인 지주의 경우에서 3 · 7제의 소작료 실시주장을 요구하는 일정한 역할을 하나, 그것이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이 시기 농민운동의 지도부가 미군정과의 타협전술에 의거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데 연유하고 있었다. 이는 미소공위의 성공적 추진에 의한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에 기대를 걸고 있던 좌익의 정치노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여기에서 농민운동의 지도부인 전농 및 각지의 농민조합과 토지획득 및 강제적 미곡공출을 둘러싼 농민들의 끓어오르는 열기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그럴 무렵 미군정의 하곡수집과 그것으로 야기된 물가상승, 그리고 비싼 식량가격 때문에 농민들은 깊은 분노에 젖어 있었다. 바로 이때 미군정의 좌익세력에 대한 무력탄압에 대응하여 9월 총파업이 단행되고 10월항쟁으로 연결, 봉기는 대구지방을 시발로 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남쪽으로 번져갔다. 농민들은 “가혹한 공출중단!”, “토지를 농민에게!”,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그리고 심지어 미군정의 폐지와 자주독립국가의 건설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대부분 지방인민위원회 · 농민조합 · 인민위원회 산하 청년단체 소속이었던 이들 농민들은 경찰서를 습격, 방화하고 경찰서장과 군수를 체포했으며 또한 신한공사의 양곡수집 창고를 점거, 곡식을 지방주민들에게 분배하고 미곡수집 기록을 불살랐다. 그러나 이러한 대부분의 폭력적 농민투쟁은 지역적이었고 자발적이었다. 다시말해 대부분의 봉기가 너무나 비조직적이었으며 지역적 경계를 넘어 연대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독촉」 산하의 우익 청년단체가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야만적인 진압을 시작했을 때 패배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봉기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봉기들이 뒤를 이었으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6 · 25가 일어남에 따라 농민에 의한 농민운동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다시피 하였다. 그 사이에서 탄생, 자리를 잡게 된 것이 1947년 8월 31일 결성을 본 「대한독립농민총연맹」이라는 우익 농민단체다. 허나 「대한농총」의 주요활동은 이승만의 단정수립을 위한 농민 기간단체로서의 기능이었으며 그외 농촌계몽운동과 자체 조직확대사업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농민운동과는 거리가 먼 개량적인 우익 농민단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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