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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art)

예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미학에 관한 일반이론을 제시하지도 않았고 또한 예술이나 문학에 관한 아무런 체계적 연구를 한 바도 없다. 따라서 이 주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은 믿을 만한 해석상의 교리를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논쟁의 소지를 마련할 뿐이었다. 자주 인용되는 《요강》의 한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예술의 전성기가 사회의 일반적 발전과 함께 또한 물질적인 토대에도 전혀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고 예술의 경우 비록 그것이 사회발전의 특수한 형식에 제약되어 있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하나의 규범이며 도달할 수 없는 이상(理想)으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한 매력을 발산한다’고 말하였다. 결국 여기서 그가 시사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여기서 마르크스는 심리학적 해석의 여지가 있음을 풍겨주고 있다) 일정한 종류의 예술은 엄격하게 사회의 물질적 토대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는 보편적이며 초역사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그는 《잉여가치론》(4장 16절)에서 이미 ‘렛싱에 의해서 풍자된 바 있는 18세기 프랑스의 환상’을 조롱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오늘날 고대인들보다 力學 등등에 있어서 더욱 진보된 상태에 있는 우리가 어찌하여 서사시를 쓸 수 없겠는가? 이러한 견해는 예술에 대해서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내에서의 그의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려는 것으로서(Laing 1978, p.10) 동시에 이것은 1890년대에 엥겔스가 쓴 몇 개의 편지에서 지적된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더 일반적인 성격규정과도 일치하는 바가 있다(C.Schmidt에게 보낸 1890년 8월 5일과 10월 27일자 편지:J.Bloch에게 보낸 1890년 9월 21일자 편지:F.Mehring에게 보낸 1893년 7월14일자 편지:W.Borgius에게 보낸 1894년 1월25일자 편지).
그러나 의와는 또 달리 사회에 있어서의 예술의 위치와 관련하여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을 비판하는 가운데(《독일이데올로기》Ⅰ권 3부 3절2), 마르크스는 ‘예술적 재능이 특수한 개인에게 전적으로 집중되고, 인민대중에게는 이것이 억제된다는 것은 노동의 분화에 따른 결과이다……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페인트공이란 없고 기껏해야 다른 여러 가지 일 가운데 페인트칠도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서 특수화된 활동으로서의 예술의 존재가 의문시되고 있거니와 이 점이 또한 노동 분화의 극복을 중요시하는 마르크스의 관점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앞의 책, 1부 AI절) ‘어느 누구도 한 가지 전문적인 활동 영역을 갖지 않고 저마다가 모두 원하는 분야에서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전체로서의 생산이 사회에 의해서 규제됨으로써 나로서는 결코 사냥꾼이나 고기잡이, 또는 양치기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또 내일은 저 일을 하는 식으로 아침엔 사냥을 하고, 오후엔 물고기를 잡으며 또 저녁에는 가축을 몰고 저녁 식사 뒤에는 비평에 종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예술 창작과 관련하여 복합적이며 기술적으로 발전된 사회를 놓고 볼 때, ‘미래의 식당을 위한 조리법’이 혼합된 것과도 같이 사변적이면서 또한 문자 그대로 새겨 본다면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특히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 속에 관통하는 인간본성에 대한 중요한 개념을 나타내주고 있다(→인간성:실천).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예술 혹은 발전된 심미적 감각이란 언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이면서도 특징적인 인간능력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 셈이다. 그리하여 마치 그람시가 비록 그 가운데 약간의 사람만이 지식인의 사회적 기능을 행사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지적이다 라고 말했듯이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이다 라고 얘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선구적 저작으로는 메링(1893)과 플레하노프(1912)의 저서를 꼽을 수 있는바, 전자는 시각예술이나 음악보다는 주로 문학에 관한 것을 다루었다. 이에 반해 플레하노프는 엄격하게 결정론적 입장을 전개하려는 의도 하에 ‘모든 인민의 예술은 (나의 의견에 따른다면) 언제나 그들이 처한 경제적 처지와 내적인 인과관계를 갖는다’고 보았다(p57).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원시사회에서의 춤을 노동의 즐거움을 재경험하기 위한 것으로(예컨대 사냥), 그리고 음악은 작업을 보조수단으로(즉 리듬을 통해)분석하였지만 그러나 노동, 유희 및 예술 사이의 일반적 관계를 논의하면서 그는 예술이 물질 생활의 필요에 따른 공리(功利)주의적 원천을 지닌데 반해 심미적 즐거움을 그 자체로서의 권능을 지닌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플레하노프에 의하면 이러한 원시적 차원을 넘어서 예술이란 계급분화와 계급 지배에서 오는 매개적 영향을 통하여 다만 간접적으로 경제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의 프랑스 희곡과 회화를 취급하는 가운데 그는 이것이 ‘귀족주의적 취미의 세련됨’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면서도 그 이후 세기에 와서는 귀족주의 지배가 부르주아지의 도전을 받게 됨으로써 부셰와 그르즈의 예술은 ‘다비드와 그 유파의 혁명적 화법에 의해 잠식되었다’고 주장하였다(p.157)
러시아 10월 혁명과 중앙 유럽에서의 혁명운동은 논쟁의 전면에 어떤 면에서는 상호대립적인 두 개의 테마를 등장시켰는데, 그것은 즉 혁명적 예술과 프롤레타리아 예술이다. 러시아에서 1917년부터 1929년까지 교육 및 예술 담당책이었던 루나챠르스키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대두되는 데 대해 별다른 규제를 가하지 않았다’(Willett 1978, p.34). 그럼으로써 그는 샤갈이 학교장으로 임명되었던 비테브스크 예술학교를 부흥시켰고 또한 칸딘스키, 페브스너 및 그 밖의 인물들이 강의하였고, 동시에 구성(構成)파의 요람이 되기도 한 모스크바 예술연구소를 설립하였다(앞의 책, p.38~9).
독일에서는 노동자 동맹 운동이 또한 예술에서의 전위운동을 지원함으로써 결국이 노동자 동맹 운동의 정치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그의 성과(예컨대 고르피우수의 바우하우스)는 파시즘이 승리할 때까지 그 역할을 다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러시아와 독일에서 혁명적 예술을 대표하는 그들 사이에 그들 사이에 매우 활기찬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와는 또 다른 면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혹은 문화)의 이념은 몇몇 영도적인 볼셰비키(트로츠키도 여기에 속함)에 의한 비판을 받는 가운데, 결국 이 프롤레타리아트조직이 당에 대항함으로써 잠재적인 반혁명 세력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은 그들 자신의 예술은 필요로 하고 또한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당파적이어야 한다는 사상이 큰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스탈린과 즈다노프에 의해서 더욱 강조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는 공식적인 소비에트 미학이론 속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정건 하에서는 예술에서의 극단적인 실험주의라든가 전위운동이 거론될 소지란 전적으로 말살됨으로써 다만 메마른 통속성만이 판을 칠 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상황이 전적으로 예술에 관한 참신한 기풍을 제거할 수는 없었으니, 즉 리프쇳쓰(그와 함께 루카치도 역시 모스크바의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에 봉직하였다)는 예술논쟁과 관련된 최초의 마르크스-엥겔스 해설판(1937)을 간행하는 이외에도, 대부분의 마르크스의 수고와 초기 저작에 기초한 마르크스 예술이론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서를 간행하였다(1933).
그러나 1930년대와 다시 그 뒤를 이어 마르크스 예술이론에 대한 주요한 공헌이 사방에서 이루어졌다. 브레히트(1938(1977))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반대하는 그 자신의 ‘서사시(叙事詩) 주장’이란 개념을 제기하면서 루카치와 그 밖의 모스크바에서 활동 중이던 그의 동료들을 겨냥하여 ‘단적으로 표현해서 그들은 생산의 적들이다……그들은 스스로 생산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의 비밀경찰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기타 인민에 대한 통제를 행하려고 할 뿐이다’라고 논평하였다(Bloch 등, 1977, p.77). 결국 브레히트의 사상은 벤야민의 미학이론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즉 그는 서사시주장을 예술적 생산의 형식과 도구가 어떻게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전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간주하였다(벤야민 968). 이러한 브레히트와 루카치 사이의 갈등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다시 말하면 새로운 내용이 가미된 19세기 부르주아 사실주의)의 옹호자들과 그리고 브레히트, 벤야민 이외에도 블로흐와 아도르노를 포함한(블로흐 1977:Willett 1978) '모더니즘’지지자들(특히 독일 표현주의와 입체주의 및 초현실주의) 사이의 폭넓은 논쟁의 일부이다.
극히 최근에 와서야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1930년대의 또 다른 주요 공헌으로는 예술사회학에 관한 세 갈래에서의 연구를 포함한 라파엘의 저작(1933)을 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마르크스 예술이론에 관한 하나의 연구는 《정치경제학 요강》(서문)에 포함된 마르크스의 원문을 상세히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결국 이것은 ‘특수한 예술적 문제에 대한 적절하면서도 단편적인 탐구 이상의 것일 수가 없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실재하는 취약성을 극복할 만한 예술사회학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p.76). 라파엘은 경제적 토대와 그리고 예술 사이의 매개물로서의 그리스 신화에 관한 마르크스적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바로 이 신화와 예술 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일련의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방향에서 그는 물질적 생산과 예술 사이의 ‘불일치한 발전’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한 나머지 결국은 ‘사적 유물론과 본질적으로 합치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 예술의 ‘영원한 매력’에 대해 언급한 마르크스의 해석을 비판하기에 이른다(p.105). 유럽역사의 특정한 기간에 걸쳐서 그리스 예술이 지닌 ‘규범적 가치’에 대해서 행한 라파엘의 해석은 전체문화가 경제적 및 사회적 변화의 결과로 인한 위기에 말려들었을 때 나타나는 ‘고전의 부활’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일련의 연구 중 세 번째 단계에서 라파엘은 모더니즘의 가장 특출한 전형으로 피카소 예술을 분석하면서, 이를 자유기업에 입각한 자본주의로부터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예술에 관한 지난 20년 간의 마르크스주의의 저술들은 주로 방법론적 연구(적절한 마르크스주의 예술개념의 추상적 정형화(定型化)와 관련된)에 그칠 뿐, 실제적 문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진 바가 없다. 지난 날에 이미 간행되었으면서도 최근에야 복간된 하나의 각별한 예외로는 산업혁명 하에서의 예술에 관한 클링겐더의 탁월한 연구가 있는데(1947), 이것은 특히 예술과 기술 사이의 교호관계 및 ‘새로이 등장하는 인간 유형’에 의한 권력장악이 예술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 이 밖에 또 꼽을 수 있는 것으로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회화, 건축, 음악에서의 모더니즘 운동에 관해 상세히 논술한 윌렛트의 업적(1978)을 들 수 있다. 최근의 이론적 논쟁에서는 그 초기단계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고려의 대상이 되어왔고, 그 원천을 마르크스 자신의 산재하는 예술개념에 두고 있는 두 가지 테마에 집중되어 있는바, 즉 그것은 1) 이데올로기로서의 예술과 2) 인간적 창조의 기본적 현현의 하나로서의 예술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 한편으로 이데올로기로서의 예술에 대한 분석은 예술형식(그러나 형식과 함께 내용면에서도 다같이)이 현존하는 특수한 역사적 국면의 전 기간에 걸쳐서 지배 계급의 전체적인 이념과 상념(想念) 속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를 나타내려는 데 있다. 결국 이것은(골드만(1956)이 문학작품과 관련하여 주장했듯이) 첫째로, 예술활동이나 형식의 의미가 갖는 내재적 구조를 형성하면서 다시 이것을 주어진 생산양식 내에서의 계급관계의, 좀더 폭넓은 구조 속에 위치지우려는 것이다. 플레하노프와 라파엘도 역시 앞에서 언급된 그들의 연구에서 이와 동일한 작업을 하려고 기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종류의 예술이 자신의 해방투쟁을 수행하는 데서 피지배계급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간주되는 가운데 결국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은 거의가 ‘혁명적 예술’의 적절한 성격부여 및 그 분석의 문제가 관련되었다. 최근에 대두된 이데올로기로서의 예술에 관한 마르크스 사상의 중요한 양상은 통속예술과 ‘문화산업’(→문화)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인데 이것은 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아도르노, 마르쿠제)의 저술에 나타나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선진자본주의 시대의 예술은 기계적 복제와 광범한 유?(流 )의 결과에 의해서 저질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불만족스러운 계급이나 집단을 진정시키고 또 통합할 수도 있는 상당한 정도의 glad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혁명적 예술의 이데올로기적 효용성에서 볼 때 극단적인 개혁은 쉽사리 지배적 상념의 중추를 이룸으로써 오히려 그 의의가 감소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와는 또 다른 시각을 지녔던 벤야민에 따르면, 기계적 복제의 주요 효과는 예술에 감도는 엘리트주의적 ‘기풍’을 파괴하고 ‘가공할 정도의 전통의 와해’(1936, p.223)를 초래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와 새로운 문화형식(예컨대 영상예술)과 유대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표현으로서의 예술이 내세우는 테마는 심미적 가치(→미학)와 인간본성(심리학)을 분석하는 데서 극히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 두 테마에 관한 한 마르크스주의 사상만이 극히 최근까지도 상대적으로 미개발 상태에 있었을 분 아니라, 지난 20년 간에 나타난 작품의 주요 골간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 사이의 심각한 이견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실천의 차원에서 보편적인 인간적 창조의 표현이며 해방적임 힘으로서의 예술은(비록 이 개념이 일단은 이론적 용어로 정형화되었다 할지라도)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에 대한 두 가지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요소를 시사해 준다. 즉 그 첫째는 예술(마치 일반적인 지적 생활과도 같이)이란 ‘백화제방'을 가능케 하면서 자유롭게 발전됨으로써 무엇보다도 어떤 정치적 힘에 의하여 부과된 예술적 도그마와 합치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에 의해 표현된 이념과 폭넓게 일치하는 방향에서 예외적인 천부적 재능을 지닌 개인에 의한 ’고차적 예술‘의 발전과 함께 예술창작은 보편적인 인간의 필요와 즐거움의 근원으로서 보다 폭넓게 육성되고 고무되어야만 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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